쾅! 덮친 순간 한 집안의 비극 도미노가 시작됐다

  • 동아일보
  • 입력 2018년 12월 7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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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운전 차보다 사람이 먼저다]무법질주 車에 하반신 마비 家長
3년 동안 치료-생계비와의 전쟁… 교통사고 중상-장애 900명 분석
50대, 수입 61% 가장 큰폭 줄고 기혼 10명중 4명 가족 해체 겪어

2009년 4월 9일. 길현명 씨(58)의 인생이 송두리째 뒤바뀐 날이다.

식료품 유통업체를 운영하던 길 씨는 대전에서 왕복 6차로 도로의 횡단보도를 건너던 중 신호위반을 하며 달려온 승용차에 치였다. 30m가량 날아가 땅에 떨어졌고, 하반신이 마비됐다. 그는 본보 기자에게 “충돌 직후 기억이 끊겼고 깨어났을 때 ‘내가 왜 병원에 있지’라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6개월 동안 입원한 뒤 2년 반 동안 재활치료를 받았다. 더 이상 일을 할 수 없게 됐고, 재활과 생계비용은 아내와 세 딸이 감당했다. 그는 “그때는 정말 살기 싫었다”고 토로했다.

극단적 선택까지 고민했던 길 씨는 가족들의 적극적 도움과 격려로 역경을 극복했다. 지금은 한국교통장애인협회 세종시협회에서 교통사고 예방활동, 장애인 돕기 활동을 하며 가족과 화목하게 지내고 있다.

하지만 상당수의 교통사고 피해자는 장애 때문에 직업을 잃고 소득이 줄면서 가족과 불화가 생기고, 이어 대인관계와 가정생활이 무너지는 ‘비극의 도미노’를 겪는다.

동아일보 취재팀은 한국교통연구원이 교통사고 제로(0)화 추진·지원 평가 사업의 하나로 작성한 ‘교통사고 사회·경제영향 조사 보고서’를 6일 입수했다. 이 보고서는 한국교통안전공단, 한국교통장애인협회 등과 함께 교통사고로 중상·장애를 입은 피해자나 가족을 잃은 유가족 등 900명을 대상으로 사고 이후 달라진 삶을 조사해 분석한 것이다.

특히 50대 가장들의 피해가 심각했다. 50대 교통사고 장애인 가정의 월평균 소득은 사고 전 311만 원에서 사고 후 120만7000원으로 61.2% 감소한 것으로 조사됐다. 10월 기준으로 50대 취업자 수는 639만여 명으로 40대에 이어 두 번째로 많다. 한창 가정과 사회의 기둥 역할을 해야 할 시기에 경제력을 잃은 것이다. 이는 가정불화로 이어졌다. 사고 당시 기혼 상태였던 50대 교통사고 장애인 가운데 41.3%가 배우자와 이혼·별거한 것으로 나타났다.

교통사고로 장애인이 된 186명 중 69.9%가 직업을 잃거나 사업을 중단했다. 50대 장애인은 일을 못 하게 된 비율이 78.6%에 달했고, 재취업 성공 비율은 29.5%에 그쳤다.

임재경 한국교통연구원 도로교통연구본부 연구위원은 “이번 조사를 통해 불의의 교통사고가 개인과 가족의 삶에 얼마나 큰 영향을 미치고, 사회에 연쇄적으로 피해를 주는지 파악할 수 있었다. 정부와 민간이 함께 사회적 대책을 마련해야 할 것”이라고 주문했다. 


교통사고 피해이후 ‘비극의 도미노’
몸 망가지고 일자리 잃고… 가족들까지 좌절의 늪으로
1998년 1월 교통사고를 당해 하반신이 마비되면서 엄 씨의 삶은 완전히 달라졌다. 4일 경기 양주시에서 만난 엄 씨가 휠체어에 앉아 인터뷰에 응하고 있다. 김동주 기자 zoo@donga.com
1998년 1월 교통사고를 당해 하반신이 마비되면서 엄 씨의 삶은 완전히 달라졌다. 4일 경기 양주시에서 만난 엄 씨가 휠체어에 앉아 인터뷰에 응하고 있다. 김동주 기자 zoo@donga.com
교통사고 피해자는 대부분 무방비 상태에서 사고를 당한다. 사고 이후 정신적·신체적 충격을 추스를 새도 없이 당장 먹고사는 문제가 이들의 발목을 붙잡는다. 지난해 교통사고로 중상을 입은 사람은 7만7266명으로 하루 211명꼴이었다. 이들의 가족들까지 감안하면 매년 수십만 명의 사람이 예상치 못했던 고통의 늪에 빠져드는 것이다. 하지만 고통을 감내하고 극복하는 건 피해자의 몫이다.

○ 좌절 속에 경제적 어려움까지 늘어

경기 양주시에 사는 엄태현 씨(47)는 친구들과 해돋이를 보려고 1998년 1월 10일 경부고속도로를 달리던 중 뒤따라오던 무면허 운전자의 차량에 들이받혔다. 그 충격으로 차 밖으로 튕겨 나갔다. 4일 양주시에서 기자와 만난 엄 씨는 “얼마 뒤 정신을 차렸는데 다리가 하늘에 붕 떠있는 느낌이었다”고 기억했다. 하반신이 마비된 것이다. 그는 장애 1급 판정을 받고 휠체어 생활을 시작했다.

사고 당시 엄 씨는 키 176cm에 몸무게 70kg인 건장한 청년이었다. 경찰관 임용시험을 준비하며 어엿한 사회인으로 자리를 잡을 것이라는 꿈을 갖고 있었다. 하지만 사고로 모든 것이 물거품이 됐다. 경제적 활동을 할 수 없게 돼 사고 직후 생계를 부모님에게 의존했다. “혼자서 화장실도 못 가는 처지가 됐다는 걸 알고는 병실 침대에 누워서 죽을 방법을 궁리하기도 했다”고 말했다. 가만히 먼 산을 쳐다보던 그를 지켜보던 어머니는 슬픈 표정으로 “너 혹시 죽으려고 그러니”라고 말했다. 어머니의 얼굴을 보며 엄 씨는 마음을 다잡았다.
엄태현 씨는 군복무 시절 축구 시간을 가장 즐겼던 활동적인 청년이었다. 엄태현 씨 제공
엄태현 씨는 군복무 시절 축구 시간을 가장 즐겼던 활동적인 청년이었다. 엄태현 씨 제공

이후 지금의 아내를 만나 결혼했고 소중한 딸도 생겼다. 지금은 자신과 같이 예기치 못한 사고로 장애인이 된 사람들에게 상담과 강연을 해주며 생계를 꾸리고 있다. 하지만 엄 씨는 “장애인이라는 사실이 익숙해졌을 뿐 완전히 극복되지는 않은 것 같다”고 했다. 그는 “여전히 튼튼한 두 다리로 달리는 꿈을 꾸다가 깨곤 한다”고 털어놨다.

많은 교통사고 피해자들은 사고 후 심리적 좌절감과 경제적 고통을 반복적으로 경험했다. 사고 후 달라진 자신의 모습에 좌절하고, 가족에게 미안한 마음까지 겹쳐 극단적 상황까지 생각하는 경우가 적잖다.

하지만 피해자가 자립하기 위한 대책은 갈 길이 멀다. 교통사고 장애인의 경우 자동차사고손해배상보장법에 의해 보험사에서 받을 수 있는 부상치료비는 상해 1급 기준 최대 3000만 원, 후유장애 보험금은 장애 1급 기준 최대 1억5000만 원이다. 간병과 지속적인 치료, 생활비를 감안하면 턱없이 모자란다.

한국교통연구원의 ‘교통사고 사회·경제 영향 조사’에서 교통사고 장애인 107명이 받은 보험금, 합의금 등 보상금 총액은 평균 4392만 원으로 집계됐다. 이 가운데 97명(90.7%)은 평균 3년 2개월 만에 이를 모두 써버렸다.

사고 당시 기혼 상태였던 교통사고 장애인의 31.9%가 배우자와 결별하며 가정의 붕괴로 이어졌다. 헤어진 이유로는 34.5%가 ‘경제적 여건 악화’를 꼽았다. ‘피해를 딛고 사회·경제적으로 재기했다’고 응답한 장애인은 37.1%에 머물렀다. 개인, 가정, 사회의 순서대로 이어지는 교통사고의 비극이다.


○ 치유되지 않는 유가족의 고통

교통사고로 중상, 장애를 입은 사람이나 유가족 등 교통사고 피해자들은 심리적 고통을 스스로 이겨내야 한다. 지난해 10월 자신이 살던 아파트 단지 내 횡단보도에서 차에 치여 5세 딸을 잃은 119 구급대원 서모 씨(40·여)는 지금도 약을 먹지 않고는 일상을 이어가기 힘들다. 숨이 멎어가던 딸에게 심폐소생술(CPR)을 했지만 살리지 못했던 고통 때문이다. 너무 힘들어 일을 그만두는 것도 생각했지만 의사의 권유로 지금도 일을 이어가고 있다. 스스로를 혼자 가두게 되면 고통이 더 악화할 수 있을지 모른다는 우려 때문이다.

이번 조사에 참여한 유가족 200명에게 ‘사고 후 생활 변화’를 물었더니 56%가 사고 후 ‘외출 빈도가 줄었다’고 답했다. 경제적 어려움(43.5%)보다 많다. 가해자에 대해서는 58%가 ‘아무리 보상을 받아도 슬픔이 치유되지 않는다’고 응답했다.

또 교통사고로 부모를 잃은 유자녀는 응답자 157명 중 42.7%가 ‘사고로 인한 큰 충격으로 매우 힘들다’고 답했다. 36.1%가 학업 성적 하락을 겪었고, 54.1%는 ‘지금도 사고의 충격에서 재기하지 못했다’고 응답했다. 하지만 유자녀 양육을 위해 새 보호자를 통해 지급되는 보상금은 평균 4622만 원에 그쳤다. 학비 등을 감안하면 턱없이 부족하다.

서형석 skytree08@donga.com / 양주=최지선 기자


日, 자녀들 경제난 막기위해 19세까지 연금 나눠 지급

“어디서 도움을 받아야 하는지 전혀 몰랐다.” “섬에 뚝 떨어진 기분이었다.”

지난해 우리나라 교통사고 부상자는 32만2829명, 중상자는 7만7266명에 이른다. 하지만 교통사고 피해자들은 사고 직후 어디에 도움을 청해야 할지도 몰랐다고 입을 모았다. 이들이 받을 수 있는 도움도 제한적이다.

한국교통연구원 조사에 따르면 교통사고 중상자의 27.5%는 ‘사고 이후 전문가와 상담하고 싶었지만 어디서, 어떻게 해야 할지 알지 못했다’고 응답했다. 사고 후 처리 과정에서 경찰이나 보험회사 외 다른 기관의 도움을 받은 피해자는 전체의 12%에 불과했다.

교통안전 선진국으로 꼽히는 일본은 1970년대부터 교통사고 피해자와 유가족을 위한 다양한 지원 정책을 펼쳐왔다. 2003년에는 자동차사고대책기구(NASVA)를 설립하고 교통사고 정도와 양상, 개인 형편에 따라 단계별 조치 매뉴얼을 만들었다. NASVA는 전국에 50개 센터를 운영하면서 사고 직후부터 피해자와 밀착해 대처할 수 있도록 의료센터와 위탁병원을 운영한다. 전국 지방자치단체에 교통사고 상담소가 상시 운영 중이다.

교통사고 사망자의 유자녀에 대한 지원도 체계적이다. 일본은 1980년 공익재단법인 ‘교통유아(遺兒) 육성기금’을 설립했다. 교통사고로 가장이 사망한 가정은 5년 이내에 저소득층으로 떨어질 확률이 높기 때문에 유자녀가 만 19세가 될 때까지 학령별로 연금을 차등 지원한다. 또 교통사고 유자녀 친목회를 운영해 같은 처지에 놓인 아동들이 심리적 고통을 나눌 수 있도록 하는 트라우마 치료 지원도 한다.

반면 국내의 경우 전문적인 교통사고 피해자 지원 기관이 없어 피해자 대부분이 경찰에 상담을 의존하는 실정이다. 김락환 한국교통장애인협회 중앙회장은 “교통사고 피해자들은 보상금을 4년 안에 거의 대부분 소진하는데 직업 전선에 복귀하지 못해 경제적 어려움을 겪는다”면서 “보상금을 연금식으로 지급할 수 있는 제도가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이어 “시군구별로 상담센터를 짓고 사고 직후부터 재활, 유자녀까지 체계적으로 관리해 이들이 사회에 복귀할 수 있도록 도와야 한다”고 말했다.

최지선 기자 aurinko@donga.com
#교통사고 피해이후#교통사고 중상-장애 900명 분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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