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 부촌서 피란민촌으로… “후암시장엔 이북음식 많았지”

  • 동아일보
  • 입력 2018년 3월 19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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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고향 서울]<3> 60년 토박이 오정옥씨의 후암동

서울 용산구 후암동 60년 토박이 오정옥 씨가 남산에 올라 동네를 가리키며 웃고 있다. 안철민 기자 acm08@donga.com
서울 용산구 후암동 60년 토박이 오정옥 씨가 남산에 올라 동네를 가리키며 웃고 있다. 안철민 기자 acm08@donga.com
오정옥 씨(61·여)는 1957년 3월 서울 용산구 후암동에서 4남매 중 맏딸로 태어났다. 평안남도 진남포항에 살다가 6·25전쟁 중 월남한 아버지가 손수 지은 집에서였다. 북에서 목수로 일한 아버지는 수수깡과 각종 판자때기를 세우고 흙을 발라 집을 지었다. 이후 10년 전 돌아가실 때까지 손수 또는 인부를 불러 고쳐온 그 집에서 오 씨는 여전히 살고 있다.

오 씨가 다닌 후암초등학교를 내년이면 손자가 입학한다. 아버지 손을 잡고 자주 올랐던 남산을 지금은 손자의 손을 잡고 오른다. 오 씨 아버지는 “이곳이 고향이다”란 말을 입버릇처럼 했다고 한다. 오 씨는 “피란민들이 만든 이 동네를 아버지는 무척 사랑하셨다. 임종도 집에서 했다. 내가 후암동을 떠날 수 없는 이유다”라고 말했다.

○ 피란민의 동네 후암동

신세 질 지인도, 돈을 빌릴 친척도 없는 피란민들은 6·25전쟁 이후 후암동으로 몰려들었다. 산비탈에 오 씨 아버지처럼 집을 지었다. 수수깡에 흙을 발라 벽을 세우고 지붕이 될 만한 나무판자를 얹었다. 일주일이면 부엌 하나, 방 하나 딸린 ‘살 만한’ 집이 만들어졌다.

“후암동 삼거리를 기준으로 남쪽은 부유층, 북쪽은 ‘하꼬방’(판잣집)이 다닥다닥 붙어 있었지.”

물이 부족해 단수(斷水)인 날에는 남산 중턱 우물을 자주 찾았다고 한다. “나중에 구청에서 우물을 다 막았는데, 하나씩 없앨 때마다 주민들이 얼마나 반대했는지 몰라. 남산에서 용산고등학교까지 흐르는 후암천도 있었는데 그것도 나중에 다 덮었지.” 1967년 후암천 1500m 구간은 악취가 심해 복개됐다.

피란민들은 동네 어귀나 후암시장 등에서 좌판을 깔았다. 일부는 건설현장 노동자로 일하며 생계를 유지했다. 후암시장에는 다른 시장에서는 맛볼 수 없는 이북 음식이 많았다.

“옆집 아저씨도 후암시장에서 주먹만 한 만두를 빚어 팔았어. 실향민들이니까 다들 고향음식을 먹고 싶어 하잖아. 그나마 돈을 모은 사람들은 식당을 차렸고, 나머지는 콩나물을 기르거나 야채를 떼다가 길가에서 팔았어.”

오 씨도 어렸을 때 만두를 즐겨 먹었다. 무말랭이로만 만두소를 채운 이북식 만두. 겨울이면 얼음을 동동 띄운 동치미국수가 밥상에 자주 올랐다. 창문 너머 얼음장수 목소리가 들리면 오 씨는 어머니가 주신 돈을 쥐고 냉큼 나가서 사왔다.

“얼음장수 오는 날은 동치미국수 먹는 날이었어. 지금도 겨울이면 꼭 해먹는 음식이야.”

○ 일제강점기, 일본 부유층이 모이다

후암동이란 이름은 아들을 낳게 해달라고 비는 두텁고 큰 바위인 ‘두텁바위’가 있었다는 데서 유래했다. 안철민 기자 acm08@donga.com
후암동이란 이름은 아들을 낳게 해달라고 비는 두텁고 큰 바위인 ‘두텁바위’가 있었다는 데서 유래했다. 안철민 기자 acm08@donga.com
후암동은 일제강점기 때 만들어졌다. 인적이 드문 후암동에 일본인들이 집단 거주하면서 마을의 면모를 갖춰 나갔다. 용산 일본군 병영(현 주한미군 용산기지)과 가까웠던 후암동은 일본의 개발업자에게는 기회의 땅이었다. 완만한 언덕에 지은 집을 선호하는 일본인 눈에 낮은 구릉지인 후암동은 주거지로 안성맞춤이었다. 조선토지경영주식회사 설립자 미요시 같은 인물들이 땅을 사들여 고급 주택과 가정집을 지었다.

지금도 동네를 유심히 살피며 걷다 보면 적산가옥(敵産家屋·광복 후 정부에 귀속됐다가 일반에 불하된 과거 일본인 소유 주택)을 볼 수 있다. 1910년 일본인 자녀들이 다니던 삼광초등학교(옛 삼판소학교)에서 조선총독부와 이어지는 삼판로(현 후암로)를 중심으로 일본식 주택이 들어섰다. 광복 이후 적산가옥에 사람들이 들어가 살았다. 현재 약 300채가 남아있다.

“그때만 해도 빈집에 그냥 들어가 사는 사람이 많았어. 적산가옥에 살고 나중에 구청에 등록했지. 집 구조가 참 특이했어. 대부분 2층에 지하실이 있었지. 거실에 있는 좁은 계단을 오르면 또 다른 방이 나왔는데 어찌나 신기하던지….”

현재 적산가옥 상당수는 게스트하우스 또는 카페로 개조해 사용되고 있다. 최근에는 일본에까지 알려져 일본인 관광객들도 찾아온다.

○ 남산도서관에서 찾은 족보

오 씨는 주택가 길가에 꽃을 심는 ‘마을 꽃길 가꾸기’ 활동에 참여하고 있다. 오 씨가 맡은 구역은 후암교회에서 용산도서관으로 이어지는 골목. 그가 수십 년간 오르내린 길이다.

“있던 집을 허물고 또 집을 짓는데 어째 더 삭막해지는 것 같아. 예전에는 빈대떡이라도 부치면 무조건 옆집 가족들 것까지 넉넉히 만들었지. 그런 정을 나누던 사람이 거의 다 떠났어. 정이 넘치던 마을 모습을 되찾을 수 있을까 싶어 꽃길 만들기에 동참했지.”

오 씨는 남산도서관을 올라 후암동을 내려다봤다. 남산도서관은 아버지와 자주 찾았다. “4남매 손을 잡고 남산도서관을 자주 오셨어. 실향민이라 뿌리를 찾아주고 싶으셨나봐. 족보에서 당신 이름을 발견해 우리에게 보여주셨어. 족보를 찾아볼 수 있는 남산도서관은 후암동 주민들에게 고향을 느끼게 한 곳이기도 해.”

오 씨는 고급 주상복합아파트와 다세대주택이 빼곡히 들어선 동네를 한참 바라봤다. “일제 때는 ‘부자동네’, 이후에는 피란민의 ‘제2의 고향’. 이런 두 얼굴을 가진 이 동네를 남은 일생 동안 잘 가꾸는 게 바람이야.”

김단비 기자 kubee08@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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