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라우마 떨쳐낼 손길 필요… 年10회 이상 치료 받아야 효과

  • 동아일보
  • 입력 2016년 9월 5일 03시 00분


코멘트

[프리미엄 리포트/자살의 전염 고리 끊어라]
한국 자살자 10만명당 27명… OECD 국가중 자살률 13년째 1위
예방 예산 한국 59억-일본 3000억
유가족 위한 ‘사후개입’ 턱없이 부족… 복지부 자살예방 담당자 단 2명
콜센터에도 유가족 전담자는 없어

통계청에 따르면 우리나라의 자살 사망자는 2014년 1만3836명으로, 인구 10만 명당 27.3명이다. 2003년 이후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중 자살률 1위라는 불명예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한 사람의 자살로 최대 28명이 심각한 영향을 받는다는 연구 결과를 감안하면 산술적으로 매년 최대 38만여 명이 자살의 영향력 아래 놓이는 셈이다. 이 때문에 자살률을 낮추기 위해서는 위기 개입이나 예방 못지않게 ‘사후 개입(postvention)’이 중요하다는 의견이 나온다.

○ 유가족 안중에 없는 행정절차

“집에서 병원으로, 병원에서 파출소로, 파출소에서 또 시신 발견 장소로…. 계속 어디론가 가야 해요. 이동 중에도 ‘부검을 하실 거냐’고 계속 물어봐요. 마치 내가 이런 상황을 이미 겪어 봐서 어떻게 해야 할지 다 알고 있는 사람처럼 말이죠.”

남편을 자살로 잃은 그날을 김희진(가명·46) 씨는 이렇게 기억했다. 숨진 남편의 모습을 보는 것도 고통스러운데 그 와중에 병원 관계자는 다가와 병원비를 내라고 말했다. “잔인하죠. 결국 남편 카드로 계산했어요. 죽은 사람 카드로 ‘내가 죽었다’고 계산을 하는 거예요.”

장례를 치르고 얼마 뒤 구청에서 전화가 왔다. ‘사망신고를 못 받아주겠다’고 했다. 알고 보니 담당 경찰이 사망 장소를 잘못 기록해서 생긴 행정 오류였다. 경찰과 구청에 수차례 연락을 돌리고서야 신고할 수 있었다. 모든 절차가 김 씨에게는 고통이었다. 상담기관을 찾기 전까지는 어떤 심리적 보호도 받지 못했다. 다행히 아이들도, 자신도 무너지지 않았지만 도움의 손길이 절실했었다고 김 씨는 말한다.

“‘자살 예방 걷기 대회’ 같은 걸로 자살이 예방되면 남편이 죽었을까요? 차라리 확실히 눈에 보이는 자살 유가족에 대한 정책, 사후 개입이 명확하게 제도화됐으면 좋겠습니다.”

김 씨의 경우처럼 대부분의 자살 유가족은 사랑했던 사람의 죽음을 슬퍼할 시간조차 제대로 갖지 못한다. 사망 신고부터 시작해 모든 과정을 스스로 해결해야 하기 때문이다. 중앙심리부검센터 관계자는 “효율적 사후 개입을 위해 경찰청과 업무협약을 맺었지만 말뿐”이라고 했다. 그는 “경황이 없는 유가족을 위해 사망 이후 행정 절차를 정리한 한 장짜리 안내문을 만들어 경찰에 배포했지만 의무성이 없어 담당 경찰관의 재량에만 의존해야 하는 상황”이라고 토로했다.

○ 부족한 예산, 그나마도 삭감

전문가들은 자살로 인한 트라우마는 1년에 최소 10차례 이상은 상담을 받아야 치료 효과가 있다고 설명한다. 하지만 인력이나 예산 등은 이에 미치지 못하고 있다. 국내 기관들은 제대로 된 연구를 진행하기도 벅찬 상황이다.

정부는 유가족 지원이나 사후 개입뿐만 아니라 자살 예방 사업 자체에 큰 노력을 기울이지 않고 있다. 보건복지부에서 자살 예방 사업을 담당하는 공무원은 단 두 명. 보건복지콜센터에 있는 123명의 상담원 중 유가족 지원 전담자는 없다.

예산도 턱없이 부족하다. 자살 예방 사업을 위한 복지부의 지난해 예산은 총 63억 원이었다. 그나마도 올해는 59억 원으로 줄었다. 비판이 이어지자 기획재정부는 내년도 관련 예산을 올해보다 20%가량 늘렸지만 그래도 73억 원이다. 2013년 기준 연간 3000억 원 이상의 예산을 자살 예방에 투입하는 일본에 비하면 턱없이 부족하다.

시민단체도 “자살 유가족 관련 사업을 위한 지원이 절실하다”고 말한다. 한 사립 자살예방단체의 상담사는 “사후 개입의 중요성이 계속해서 커지고 있는데 현재 정책은 여전히 이미 위기에 처한 사람들을 구제하는 사업과 홍보에만 치우쳐 있다”며 한숨을 쉬었다.

○ “유가족 심리적 2차 피해 막아야”

해외에서는 자살 관련 연구와 정책이 활발히 펼쳐지고 있다. 핀란드는 이미 1986년부터 자살 예방 대책을 수립해 1990년대 대규모의 심리 부검 활동을 벌였다. 그 결과 핀란드의 자살률은 1990년 10만 명당 30.2명에서 2013년 15.8명으로 낮아졌다. 일본은 2006년 자살대책기본법을 수립한 이래 다양한 자살 예방 대책을 펴고 있다. 영국 잉글랜드는 아예 ‘자살 유가족 또는 자살로 인해 영향을 받은 사람들에 대한 더 나은 지원’을 자살 예방 정책의 주요 목표로 삼고 있다.

전문가들 역시 정책적으로 사후 개입 장치를 마련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나선영 한국생명의전화 사무국장은 “호주는 자살 유가족을 위해 유품 정리부터 개입해 지원해 준다”며 “경찰 조사 때 심리 상담을 의무화하고 사망과 관련한 행정 절차에 복지기관이 적극적으로 개입하는 원스톱 시스템을 고려해야 한다”고 말했다. 한 자살 유가족은 “스스로 자살 유가족임을 밝히는 것은 ‘커밍아웃’ 수준으로 힘든 일”이라며 “여러 기관의 도움을 받을 수 있다는 걸 알려주고 상담을 권하는 사람도 많아졌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적극적이고 선제적인 자살 예방이 중요하다는 목소리도 나온다. ‘몸의 병’에 비해 ‘마음의 병’은 겉으로 잘 드러나지 않기 때문에 건강검진 등을 통해 심층적으로 전수조사를 해야 한다는 것이다. 비영리민간단체 자살예방행동포럼 라이프 김영숙 이사는 “자살 관련 상담시설들은 대부분 ‘언제든 손을 내밀라’고 말하지만, 정말 위험에 빠져 있는 사람들은 대부분 그럴 힘조차 없다”며 “누군가가 먼저 손을 내밀어 주고 찾아가야 이들을 구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유가족 간의 네트워크가 강화돼야 한다는 의견도 나온다. 자조모임 참석자인 정모 씨(58)는 “유가족 중 희망자를 상담 전문 인력으로 활용하는 것도 방법”이라며 “상담받는 사람도 거부감이 덜하고 상담하는 유가족도 위로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가족 7명을 자살로 잃은 정태섭(가명) 씨는 고통을 극복한 자신의 경험을 청소년들에게 ‘토크콘서트’나 힙합 공연을 통해 공유하고 싶다고 말했다.

“예전에는 혼자만 살았다는 죄책감 때문에 괴로웠지만 이제는 ‘떠난 누나 몫까지 두 배로 열심히 살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비슷한 아픔을 겪고 있는 친구들에게 메신저가 되어주는 것이 제 역할인 것 같습니다.”

권기범 기자 kaki@donga.com
#자살#정신과#치료#정부#정책#유가족#트라우마#자살 예방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댓글 0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