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 포커스]대한민국 문화유산상 받은 무형문화재 전흥수씨

  • 입력 2004년 12월 14일 18시 21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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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남 예산군 덕산면 대동리 한국고건축박물관에서 전흥수 관장이 전시물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2개의 전시관과 작업실 등으로 구성된 박물관에는 우리나라 주요 전통 건축물을 10∼20%로 축소한 모형들이 빼곡히 전시돼 있다. 예산=윤승모 기자
충남 예산군 덕산면 대동리 한국고건축박물관에서 전흥수 관장이 전시물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2개의 전시관과 작업실 등으로 구성된 박물관에는 우리나라 주요 전통 건축물을 10∼20%로 축소한 모형들이 빼곡히 전시돼 있다. 예산=윤승모 기자
“장인정신이고 뭐고 그런 생각 있었나…. 먹고살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일을 하다 보니 이리 된 거지.”

12월 8일 대한민국 문화유산상(보존·관리 부문)을 받은 전흥수(田興秀·65·중요무형문화재 제74호 대목장) 한국고건축박물관장은 ‘장인정신’, ‘사명감’과 같은 말을 입에 올리지 않았다. 거창한 명분이 아니라 생존의 절박감이 오늘의 그를 있게 한 원동력이라는 얘기였다.

가난한 목수였던 그의 아버지(2002년 작고)는 식구를 줄이기 위해 초등학교를 막 졸업한 그와 다섯 살 아래의 동생을 집 근처 수덕사에 맡겼다. 절에서 먹고 자면서 경전 공부도 하고 잡일도 거들었다. 하지만 그는 엄한 절 생활을 견디지 못하고 5년 만에 뛰쳐나왔다. 그때 절에 남아 출가한 동생이 바로 조계종 중앙종회 의장을 지낸 설정 스님이다.

다시 아버지를 따라다니며 목수 일 하기를 2년여. 18세 때 집을 뛰쳐나와 무작정 상경했다. “어렸을 때부터 아버지를 도와 목수 일을 해야 했는데, 그게 정말 죽기보다 싫었어. 하루종일 톱질만 해 봐…. 생각만 해도 징글징글해.”

서울에선 포목공장에 다니기도 했고 청량리 일대를 무대로 활동하던 폭력조직에 몸담기도 했다. 그러고 보니 예순을 넘긴 지금도 그에게서는 소싯적 ‘주먹생활’의 흔적이 엿보였다. 작지만 다부진 체격에 직설적인 말투. 21세에 군에 입대하면서 방황이 끝났고, 24세에 제대하면서 다시 목수로 돌아왔다. 하지만 이때도 좋아서는 아니었다. “제대했으니 직업은 있어야겠고…. 배운 도둑질이니 그 지겨운 목수 일을 다시 시작할 수밖에.”

다행이라면 이때 대목장 고 김중희 씨를 만나 전통 건축에 대한 안목을 넓힐 수 있었다는 점. 도제수업은 아니었고 김 씨가 도편수로서 일감을 맡아 목수들을 모으면 거기에 들어가 품삯을 받고 일하는 관계였다.

타고난 눈썰미 덕에 목수 일은 누구 못지않게 잘 해냈지만 그는 일터에서 늘 외톨이였다. 마음에 들지 않으면 연배를 불문하고 대드는 ‘다혈질’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 불같은 성격은 그의 성공을 앞당긴 요인이기도 했다. “아니꼽게 구는 선배 목수들을 볼 때마다 ‘두고 봐라. 당신들을 내 밑에서 부리고 말겠다’는 오기가 치솟더라고.”

대목 세계에선 ‘소년’에 불과한 나이인 31세에 독립했다. 창덕궁 가정당, 관악산 연주암, 오대산 월정사 대웅전, 속리산 법주사 대웅전, 전국 각지의 대순진리회관 등 그가 지금까지 신축 또는 개수한 건물은 연면적 4만3000평에 이른다.

전통건축은 건축비가 평당 1800만 원 정도에 이르지만 문화재 개보수나 사찰과 별장용 한옥 등의 수요가 꾸준하다. 잘만 하면 ‘돈’이 되는 것. 그도 1970년대 말부터는 돈을 만질 수 있었다. “스물아홉에 결혼할 때도 달랑 식만 올리고 곧바로 서울로 떠날 만큼 집이 싫었는데, 막상 돈을 버니 고향 생각부터 나더라고. 그때부터 고향 예산에 한 마지기씩 땅을 샀지.”

1998년 그 땅에 한국고건축박물관을 세웠다. 박물관에는 숭례문, 부석사 무량수전 등 조형미가 빼어난 전통 건축물의 목조 뼈대를 실물의 10∼20% 크기로 재현해 후학들이 전통 건축을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했다. 100억원이 넘게 든 대역사다. 그는 “돈이 있으면 사(邪)가 낀다. 차라리 내가 죽기로 일한 결과를 남기는 게 낫겠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전통 건축을 배우려는 이들은 지금도 적지 않다. 전통건축학과를 개설한 대학도 있다. 그러나 그는 후학들의, 일에 대한 태도에 불만이 많다. “너무 돈만 밝힌다”는 것. ‘옛날에도 돈 때문에 일하지 않았느냐’는 우문에 그가 내놓은 현답은 이렇다.

“옛날의 ‘돈’이란 이 일을 하지 않으면 굶는다는 절박감이었어. 그러니 망치가 날아다니는 그 험한 판을 견뎌 냈지. 그런데 요즘은 ‘이놈아 똑바로 해’라는 한마디에 연장 놓고 가 버려. 달리 먹고살 길이 많다 이거지. 하지만 말이요, 절박하지 않으면 큰일을 할 수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해.”

○전흥수 관장은

△1938년 충남 예산군 덕산면 대동리 출생

△1983년 문화재 수리기능 목공 제 608호

△1990년 한국문화재기능인협회장

△1998년 동국대 불교대학원 사회복지학과 수료

△1998년 한국고건축박물관 건립

△2000년 중요무형문화재 제74호 대목장

△2004년 국립 한국전통문화학교 초빙교수

예산=윤승모 기자 ysmo@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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