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포커스]고구려硏 회장직 물러난 서길수 교수

  • 입력 2004년 9월 14일 18시 15분


코멘트
지난달 말 ‘고구려 연구회’ 회장직에서 물러난 서길수 서경대 교수는 “향후 5년 정도는 그동안 수집한 고구려 관련 자료 정리 작업을 하고 그 이후는 지식보다는 지혜의 영역을 탐구해보고 싶다”고 말했다. -김미옥기자
지난달 말 ‘고구려 연구회’ 회장직에서 물러난 서길수 서경대 교수는 “향후 5년 정도는 그동안 수집한 고구려 관련 자료 정리 작업을 하고 그 이후는 지식보다는 지혜의 영역을 탐구해보고 싶다”고 말했다. -김미옥기자
“중국 지안(集安)을 처음 방문한 것이 1990년이었습니다. 조선족 청년의 안내로 돌아본 고구려 유적의 규모는 상상을 훨씬 뛰어넘었죠. 조상의 기상을 눈으로 보면서 고구려 연구에 남은 일생을 보내자는 생각을 하게 된 겁니다.”

서길수(徐吉洙·60) 서경대 경제학과 교수는 그렇게 고구려에 빠져들기 시작했다. 1994년 ‘고구려 연구소’를 설립해 본격적으로 고구려 연구에 뛰어들었고 40여 차례 고구려 유적지를 방문해 고구려인의 유산을 카메라에 담아 정리했다. ‘고구려 연구소’는 1996년 ‘고구려 연구회’로 이름을 바꾸고, 고구려에 관한 학문 연구를 본격화했다. 중국 정부가 ‘동북공정(東北工程)’을 통해 고구려 역사를 왜곡하고 있다는 사실이 논란을 빚기 한참 전의 일이다.

그동안 조용히 ‘고구려 지킴이’ 역할을 해 오던 서 교수는 고구려 역사 왜곡 문제가 한창 사회 이슈로 떠오른 지난달 말, 돌연 고구려연구회 회장직에서 물러났다. 왜일까? “학회에서 할 일은 다 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처음부터 고구려사 연구를 활성화시키기 위한 징검다리 역할을 하려고 했을 뿐입니다. 이제 정부 지원도 잘 되는 것 같고 고구려를 연구하겠다는 사람들도 많아진 것 같아서….”

그는 “처음 고구려 유적을 봤을 때 ‘사대주의’를 넘어설 수 있는 웅장한 스케일에 반했다”고 말했다. 1980년대 일제가 전국에 박아놓은 쇠말뚝을 뽑으러 돌아다녔던 ‘전력’이 말해주듯 그의 고구려 연구도 한민족의 기상을 지키자는 취지에서 시작된 것이었다.

경제학자인 그가 고구려 연구를 하겠다고 나섰을 때 학계의 시선은 그리 곱지만은 않았다. ‘엉뚱한’ 학문에 뛰어든 것으로 비쳤기 때문이다.

“제 전공이 경제사입니다. 평생 역사를 공부해 왔습니다. 그런데 마치 제가 전혀 관계없는 학문을 하는 것처럼 알고 있는 사람도 많더군요.”

학계의 선입견에도 불구하고 ‘고구려 연구회’는 지난 10년간 적지 않은 학문적 성과를 이뤄냈다. 18권의 연구 논문집을 펴냈고, 국제 학술회의도 10차례 개최했다. 발표 논문만도 250편이 넘는다. 현재 100여명의 학자가 회원으로 참여하고 있다.

고구려를 자국의 역사로 편입하려는 중국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은 상황이지만, 고구려사를 둘러싸고 중국 학계와 ‘싸움’을 할 경우 충분한 ‘승산’이 있다는 것이 그의 견해다. 중국에 비해 우리가 연구자와 연구 성과 등의 자원을 훨씬 많이 갖고 있다는 것이다. 10일 열린 고구려 연구회 정기 학술발표회에서 그는 고구려사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은 학자가 한국에 32명 있는 데 비해 중국에는 2명에 불과하다는 조사 결과를 발표하기도 했다. 다만 중국이 역사의 ‘귀속 문제’에 연구를 집중하고 있는 반면 한국은 ‘당연히 우리 역사’라는 생각으로 순수한 학문적 연구만을 해 왔다는 점이 ‘마음에 걸리는’ 대목이다. 그는 “중국이 정부 차원에서 고구려사 연구에 매달린다고 해서 미리 겁먹을 것이 아니라 지금까지의 연구 성과를 토대로 다양한 차원의 학술 활동을 꾸준히 전개해 나가야 한다”고 말한다.

‘고구려 연구회’ 회장직에서는 물러났지만 그는 고구려사 연구에서 손을 뗄 생각은 전혀 없다. “앞으로 5년 동안은 여태까지 모은 고구려 관련 자료를 정리할 계획입니다. 그 이후에는 다른 공부도 해볼 마음이 있기는 하지만….” 그가 지금까지 고구려 유적지를 다니면서 찍은 사진 자료는 슬라이드 필름만 1만여컷이나 된다. 최근 중국 당국이 주요 고구려 유적에 대한 한국 학자의 접근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는 상황이어서 그의 자료는 더욱 소중한 가치가 있다.

그가 5년 이후에 생각하는 ‘다른 공부’는 무엇일까. “정년퇴임 이후에는 생사에 관한 문제를 연구하겠다고 생각해 왔어요. 사실 그건 지식보다는 지혜의 영역이겠죠. 자료 정리 작업이 끝나면 티베트와 인도를 여행할 계획입니다. 지금까지 ‘채우는’ 공부를 해 왔다면 그곳에서는 ‘비우는’ 공부를 하고 싶습니다.”

▼ 서길수 교수는▼

▽1944년 전남 화순 출생 ▽국제대(현 서경대) 경제학과, 단국대 대학원 석·박사(한국경제사) ▽1979년∼현재 서경대 경제학과 교수 ▽1994∼2004년 고구려연구회 회장 ▽현재 고구려 연구재단 이사 ▽저서 ‘고구려 역사유적 답사’ ‘대륙에 남은 고구려’ 등

주성원기자 swon@donga.com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댓글 0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