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린 21/침묵하는 내부고발]조직비리 폭로땐 배신자 낙인

  • 입력 1999년 7월 13일 18시 36분


《휘슬 블로어(Whistle―blower), 즉 호루라기를 부는 사람이다.

조직내부의 부정과 비리를 보고 “여기 불의(不義)가 있다”고 소리치며 호루라기를 불어 세상에 알리는 내부고발자를 의미한다.

미국 등은 휘슬블로어 보호제도를 통해 조직을 정화(淨化)하는 중요한 부패 통제장치로 활용하고 있다. 일종의 감시제도로 부패감시에 큰 역할을 하고 있다.

하지만 부패가 워낙 고질화 돼있고 동양적 엽관문화가 뿌리깊은 우리 사회에서 내부고발자들은 ‘배신자’로 철저하게 ‘응징’을 받아왔다. 이에 따라 시민단체를 중심으로 내부고발자 보호제도 마련을 위한 입법적 노력이 진행돼 왔지만 아직 그 성과는 나타나지 않고 있다.

최근의 경기 화성 씨랜드 청소년수련원 참사도 불의에 저항했지만 끝내 타협할 수밖에 없었던 군청계장의 내부고발이 있었더라면 막을 수 있는 사건이었다.

우리 사회의 부패고리를 끊기 위한 내부고발자 보호제도의 필요성과 제도화 노력의 현주소, 그리고 외국의 사례 등을 점검해본다. 내부고발자보호운동이 촉발되는 계기를 만들었던 이문옥 감사원감사관의 얘기도 들어봤다.》

올해초 중견기업에 근무하는 A씨는 참여연대 내부고발자 지원센터인 ‘맑은사회만들기본부’에 전화를 걸어왔다. “이건 분명한 탈세인데 방조할 수도 없고 어떻게 해야 하느냐”는 내용이었다.

며칠 뒤 참여연대를 찾은 A씨는 자신이 다니는 회사의 내부비리를 상세하게 털어놓았다. 다만 “문제를 일으킬 생각은 없다. 회사가 문을 닫거나 누가 다치는 일이 없어야 한다”는 조건을 제시했다.

그러나 참여연대측은 그를 도와줄 방법이 없었다. A씨의 요청대로 ‘조용히’ 문제를 해결할 방법이 없었기 때문이다.

더욱이 A씨를 보호해줄 수 있는 방법이 전혀 없는 상황에서 그에게 내부고발에 따른 희생을 감수하라고 요구할 수도 없었다. A씨는 “일단 회사내에서 문제를 시정하기 위해 노력해보겠다”며 발길을 돌렸다.

이후에도 A씨는 여러차례 참여연대를 찾아왔다. 증거자료라며 서류를 맡겨놓기도 했고 자문변호사와 대처방안을 상담하기도 했다. 이 과정에서 A씨는 “회사측에서 해결하겠다고 해놓고도 아무런 움직임이 없다. 그런데 동료들이 나서서 나를 말린다”고 하소연했다.

그로부터 3개월여. A씨는 전화로 “도저히 더는 못버티겠다. 없던 일로 해달라”고 통보해 왔다. 그 뒤 그는 연락을 끊었다.

지난 10년 사이 우리 사회는 ‘양심선언’ ‘폭로’ 등의 이름 아래 갖가지 굵직한 내부고발 사건들을 경험했다. 이문옥감사관 이지문중위 윤석양이병 한준수군수 등….

하지만 의리와 충성의 문화가 뿌리깊은 우리 풍토에서 내부고발자는 ‘고자질쟁이’로 비쳐졌고 대부분 ‘조직의 쓴 맛’을 볼 수 밖에 없었다. 평생 일터에서 파면 전직 등의 인사조치를 당하는 것은 기본이고 비밀누설 등의 혐의로 구속돼 감옥에 갇히는 고통까지 감수해야 했다.

수년에 걸친 소송 끝에 명예를 회복한 뒤에도 이들은 더이상 조직에 남아 있지 못했다.

94년 축협의 군납비리를 폭로한 김필우씨. 계속되는 인사횡포에 맞서 2년 가까운 소송 끝에 승리했지만 결국 “더이상 이런 조직에서 일할 수 없다”며 사표를 냈다. 96년 국방부 무기부품 바가지 구매실태를 고발한 박대기씨 역시 수차례의 보직변경을 겪고 결국 명예퇴직했다.

지난해 말 여당인 국민회의가 발의한 ‘부패방지기본법안’에는 내부고발자 보호에 관한 매우 의미있는 내용이 담겨 있다.

그동안 내부고발 파동을 잇따라 겪으면서 보호제도의 필요성이 입증됐고 시민단체 등의 끈질긴 노력이 뒷받침된 것이다.

부패방지기본법안은 전현직 공직자와 공직 유관단체 임직원의 내부부패행위 고발을 보호하는 규정 및 예산부정 고발행위에 대한 보호와 보상제도까지 포괄하고 있다.

하지만 이 법안은 별다른 진전없이 국회에서 잠을 자고 있다. 현 정부가 대통령선거 공약사항으로 제시했고 이미 정부에서도 수차례 내부고발자보호제도 도입방침을 천명했지만 여전히 정치적 구호에 그치고 있는 것이다. 공무원들이 극심한 반발을 보이고 있기 때문이다.

반론의 논지는 이 제도로 인해 자칫 허위나 무고에 의한 폭로가 난무하게 돼 조직원간의 불신을 조장하고 위계 질서를 깨뜨릴 수 있다는 것. 나아가 자신의 능력부족을 감추기 위해 내부고발을 악용할 수 있다는 이유까지 들고 있다.

그러나 시민단체 등에서는 “내가 입을 열면 여러 사람이 다친다” “털면 먼지 안나는 사람이 있느냐”는 식의 ‘협박성 발언’이 난무하는 우리 사회의 고질적인 부패 구조를 척결하기 위해서는 내부고발자보호제도의 도입이 시급하다고 역설한다.

참여연대 공익제보지원단 실행위원인 김창준변호사는 이에 대해 “내부고발자보호제도가 결국 자신에게 겨눠질 칼이 될 것을 우려하는 정치권과 관료들이 입법화에 반대하고 있는 것 같다”고 분석하면서 “이는 결국 내부고발 보호제도의 필요성을 역설적으로 입증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미국은 내부고발자보호제도가 가장 발전한 나라. 하지만 미국에서도 내부고발자보호법은 상당한 우여곡절을 겪고서야 이뤄졌다.

78년 제정된 공무원제도 개혁법은 ‘불법활동과 권한남용, 국민건강 및 안전에 위험한 활동을 폭로 또는 신고한 경우 정부가 공무원들을 보호해야 한다’고 규정했다. 그러나 고발자에 대한 보호규정이 너무 약해 오히려 행정부의 탄압수단으로 이용되는 부작용이 나타났다.

이에 따라 89년 별도의 내부고발자보호법이 만들어졌다. 특별조사국이 행정부내 독립기관으로 자리잡아 내부고발 내용을 조사하고 고발자를 행정부의 보복으로부터 보호하는 역할을 맡고 있다. 의회의 발의로 이뤄진 이 법안은 대통령이 한때 거부권을 행사했으나 다시 의회가 법안을 통과시켜 결국 대통령이 서명하는 진통을 겪어야 했다.

이와 함께 미국은 이른바 ‘링컨법’으로 일컬어지는 부정주장법을 제정해 놓고 있다. 이 법은 기업이 정부와 맺은 계약과 관련해 부정을 저지른 경우 내부고발을 허용하고 나아가 정부는 고발자에게 되찾은 돈의 15∼30%를 보상금으로 지급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링컨법은 남북전쟁 당시 톱밥을 화약에 섞거나 같은 말(馬)을 두세 번 팔아먹는 군수물자 부정사례가 빈발하면서 만들어졌다.

남북전쟁 종료 이후 유명무실해졌다가 80년대 후반에야 다시 빛을 보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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