北보위부 여성간부 출신 탈북자, 中 투먼수용소의 ‘치떨리는 6일’

  • 동아일보
  • 입력 2012년 2월 27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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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어”… 군견이 女탈북자를 공격했다… “북송땐 죽음” 체념의 노래를 불렀다
9년전 악몽 또렷이 기억

탈북자 안미옥(가명·왼쪽) 씨가 25일 서울 종로구 효자동 중국대사관 맞은편 옥인교회 앞에서 탈북자 북송에 반대하며 단식 농성 중인 박선영 자유선진당 의원을 만나 얘기하고 있다. 안 씨의 요청으로 얼굴을 모자이크 처리했다. 윤완준 기자 zeitung@donga.com
탈북자 안미옥(가명·왼쪽) 씨가 25일 서울 종로구 효자동 중국대사관 맞은편 옥인교회 앞에서 탈북자 북송에 반대하며 단식 농성 중인 박선영 자유선진당 의원을 만나 얘기하고 있다. 안 씨의 요청으로 얼굴을 모자이크 처리했다. 윤완준 기자 zeitung@donga.com
사나운 개였다. 중국 공안들이 수용소 방 안으로 갑자기 들이닥치며 끌고 온 것은.

2003년 3월 22일 오전 10시경이었다. 안미옥(가명·52·여) 씨는 까무러칠 뻔했다.그는 그해 3월 중국 옌볜(延邊)조선족자치주 투먼(圖們)에서 변방대에 ‘불법 월경죄’로 체포돼 투먼의 탈북자 수용소에 억류됐다. 투먼 수용소는 북송 직전 거치는 곳이다.

공안 3명은 방 안의 탈북 여성 56명 중 15명을 골라 방 한쪽으로 몰아세웠다. 나머지는 다른 쪽 벽으로 몰았다. 끌고 온 군견에게 외쳤다. “물어!”

군견은 곧장 무서운 기세로 15명에게 달려들었다. 여성들의 날카로운 비명과 군견이 물어뜯는 둔탁한 소리가 수용소 방 안 퀴퀴한 공기와 섞였다. 누구는 팔을, 누구는 다리를, 코를, 가슴을 뜯겼다.

“개 대가리가 황소 대가리 2개만 하고 키는 1m를 넘었던 것 같아요. 무서운 눈으로 혀를 할딱대고 있었지요.” 다소 과장된 듯 들리는 안 씨의 기억은 당시의 충격이 얼마나 컸는지를 알게 했다. 어떤 종류의 개인지는 기억하지 못했다.

[채널A 영상]탈북자 “벽이 몽땅 핏자국이랬어요”

안 씨와 같은 방에 있던 여성 15명은 상습 탈북자로 북송되면 죽는다는 체념이 들었던지 방에서 몸을 흔들며 시끄럽게 노래를 불렀다. 이에 공안이 벌을 준다며 군견을 푼 것이다. 이 사건 이후 상처를 봐달라며 20대 여성이 내민 엉덩이에 드러난 살점을 안 씨는 아직 잊지 못한다고 했다.

공안들은 개를 내보낸 뒤엔 “자궁 안에 숨긴 돈을 꺼내라”고 협박해 돈을 뺏어갔다고 안 씨는 증언했다. 수용될 때 맡긴 옷 안의 돈을 공안들이 다 가져가기 때문에 상습 탈북 여성들이 종종 그렇게 숨긴다고 한다.
▼ 6평 시멘트방에 양동이똥통 1개… 여성 56명 속옷만 입고 지내 ▼

전날인 21일 오후엔 다른 방에서 임신 3개월 된 여성의 비명이 들렸다. 공안이 “배가 아프니 병원에 보내 달라”고 요구하는 여성을 복도로 질질 끌고 나왔다. 머리부터 군홧발로 걷어차더니 이내 배를 찼다. 안 씨는 “바닥에 피가 물처럼 질질 흘러나왔다. 하혈인 듯했다”고 기억했다. 여성은 어디론가 끌려갔고 죽었다는 얘기가 수용소에 퍼졌다.

탈북자 강제송환에 항의해 중국대사관 앞에서 단식 시위 중인 박선영 자유선진당 의원의 농성장에서 25일 만난 탈북자 안 씨는 2시간여 동안 9년 전의 악몽을 또렷이 기억해냈다. 군견 사건과 수용소 방 구조를 설명할 땐 일어서서 재연해 보이기도 했다.

안 씨는 자신이 국가안전보위부에 있었으며 함경남도 한 지역의 위원장이었다고 소개했다. 아버지는 노동당 고위 간부를 지냈다.

수용소에 도착한 안 씨는 속옷만 입은 채 작은 방에 갇혔다. 방의 크기가 “지금 살고 있는 집(43m²·13평)의 절반 정도였다”고 했다. 그 안에서 여성 56명이 생활했다. 하루 한두 끼 나온 식사는 계란 두 개만 한 빵 한 개였다. 가끔 시래기 같은 반찬이 나왔다. 수용소에 들어갈 때 받은 나무젓가락 하나를 계속 써야 했다.

수용소 바닥은 찬 시멘트였고 니스를 바른 종이가 깔려 있었다고 증언했다. 더러운 이불이 하나 있었다. 먼저 들어온 일부가 이불을 같이 덮었고 나머지는 그냥 쭈그린 채 생활했다. 이불마저 성하지 못했다. 생리대를 주지 않아 이불솜을 떼서 사용했다. 방구석에 놓인 양동이 하나가 ‘똥통’ 역할을 했고 분뇨가 가득 차야 밖에 버릴 수 있었다.

중국인의 아이를 낳은 지 한 달 만에 체포된 한 여성은 수유를 못해 가슴 통증이 심했다. 수용자들이 젖을 짜주거나 젖이 돌지 않게 속옷을 찢어 가슴을 동여맸다. 남편과 시어머니가 면회 와 “젖 한 모금만 먹이게 해 달라”고 간청했을 땐 공안이 허락하지 않았다.

복도 건너편엔 탈북 남성들만 모은 방이 있었다. 안 씨가 위원장으로 있던 곳의 대대에서 복무했던 군인 이모 씨(당시 26세)는 전기곤봉, 물고문을 받았다고 하소연했다.

안 씨는 수용 6일 만에 북송됐다. 이때 만난 탈북 남성은 손에 붕대를 감고 있었다. 연유를 물으니 “몰래 담배를 피우다 걸려 공안들이 군홧발과 쇠뭉치로 손가락을 짓이겼다”고 했다.

안 씨는 2009년 탈북해 다음해 11월 한국에 왔다. 그는 북한에서 김일성 김정일을 비난하는 ‘불온세력’을 색출하는 일을 했다.

그런 그가 왜 2003년 3월 투먼 수용소에 갇혔을까. 안 씨의 설명은 이랬다. 1990년대 말 한국의 이모 목사가 중국 조선족 여성 윤모 씨에게 성경책을 숨겨 북한에 들여보냈다. 윤 씨는 세관에서 적발됐다. 당국은 윤 씨를 풀어주는 척하고 기독교인을 가장한 안 씨와 만나게 했다. 이후 조선족 여성들이 안 씨와 만나 선교 계획을 얘기했다. 그의 임무는 이들의 신뢰를 얻어 이 목사를 북한으로 납치하는 것이었다.

안 씨의 주장이 맞는다면 북한은 대북 선교자들을 대상으로 ‘역(逆)공작’을 폈음을 보여준다. 그는 2003년 이 목사가 중국에 왔다는 소식을 듣고 공명심에 보위부 허락 없이 중국으로 갔다가 체포됐다. 안 씨는 북송돼 구류생활을 한 뒤 노동단련대로 보내졌고 점차 자신의 일에 환멸을 느꼈다.

안 씨는 고향에 자녀가 남아 있다. 그는 18일 탈북자들이 또 체포됐다는 소식에 ‘혹 내 아이들이 아닐까’ 걱정하며 지푸라기를 잡는 심정으로 23일부터 박 의원의 농성장을 찾았다.

윤완준 기자 zeitu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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