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포커스]“권력과 부를 동시에”… 트럼프처럼 야구모자 쓰고 ‘두 토끼 몰이’

  • 동아일보
  • 입력 2019년 5월 18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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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만의 트럼프’ 꿈꾸는 궈타이밍 폭스콘 회장
기업가 출신 정치인의 흥망… CNN “궈, 트럼프 출마에 영감받아”


지난달 세계 최대 전자기기 위탁 생산업체 폭스콘(훙하이정밀공업)의 궈타이밍(郭臺銘·69) 회장이 내년 1월 대만 총통 선거 출마를 선언했다. 그의 당선 여부에 관계없이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페트로 포로셴코 우크라이나 대통령, 시릴 라마포사 남아프리카공화국 대통령, 실비오 베를루스코니 전 이탈리아 총리, 탁신 친나왓 전 태국 총리, 마이클 블룸버그 전 뉴욕시장 등 세계 곳곳에서 기업가 출신 정치인이 득세한다는 점도 눈에 띈다. “권력과 부를 동시에 지니기 어렵다”는 속설을 깬 거부(巨富) 정치인이 왜 늘고 있을까.

○ ‘성공한 기업인’ 이미지가 선거에도 유리


전문가들은 전 세계적으로 기성 정치에 대한 실망을 표하는 유권자가 증가하면서 기업가 출신 정치인 등장에 우호적 환경이 조성됐다고 평가한다. 이준한 인천대 정치외교학과 교수는 “기존 정치인에 대한 실망으로 새 인물을 찾는 유권자가 많다. 성공한 기업인이 국가 경제도 잘 꾸려갈 것이란 기대도 작용한다”고 진단했다.

이 기대에 부응한 인물이 블룸버그 전 시장이다. 2002년부터 2013년까지 3선을 한 그는 9·11테러 직후 위기에 빠진 뉴욕을 살려냈다는 평가를 받는다. 2002년 초 취임했을 때 뉴욕시의 재정적자는 약 60억 달러(약 7조2000억 원)였고 한 해 전 발생한 9·11테러로 시의 주요 수입원인 관광 수입도 최악이었다. 그는 여론의 거센 반대에도 세수 확대를 위해 부동산세를 인상했다. 시 재정이 흑자로 돌아서자 이 돈으로 시 홍보를 강화했다. 그는 뉴욕시장 중 최초로 언론, 시의회, 선출직 관료 등에게 매년 3차례 예산 현황을 직접 보고했다. 발표에서도 복잡한 숫자를 지루하게 나열하는 대신 한눈에 쏙쏙 들어오는 각종 차트와 표를 즐겨 이용했다. 소위 ‘최고경영자(CEO)형’ 발표다.

현재 뉴욕의 새로운 랜드마크인 하이라인파크와 첼시마켓도 그의 재임 중 건설됐다. 각각 흉물로 방치된 고가 철도와 과자 공장을 공원과 쇼핑몰로 바꿨다. 특히 옛것을 부수고 화려한 새 건물을 짓는 천편일률적 방식이 아니라 녹슨 기찻길, 부서진 벽 등을 고스란히 보존해 독특한 매력과 개성을 살렸다. 과거 유산을 재활용하면서 시민의 삶의 질도 높이고 많은 관광 수입까지 얻으니 일석삼조였다.

2017년 1월 트럼프 대통령 취임 후 미국 경제도 순항 중이다. 올해 1분기 미 경제는 연율 3.2% 성장했다. 2015년 1분기 후 4년 최고치다. 고용도 2010년 10월 이후 올해 3월까지 무려 102개월째 증가했다. 올해 실업률 전망치도 지난해와 같은 3.7%로 매우 낮다. 사실상 완전 고용에 가깝다. 주식시장도 2009년부터 10년째 상승 중이다. 러시아 스캔들, 중국과의 무역 마찰, 국경장벽 등 그의 일거수일투족에 대한 찬반양론이 극심하고, 의회마저 야당인 민주당이 장악했는데도 대통령의 입지가 건재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두 사람이 ‘급여 1달러’ 공약을 제시하고 기부에 적극 나선 것도 유권자들의 호감을 샀다. 블룸버그 전 시장은 12년간 22만5000달러의 시장 급여를 거부하고 1달러만 받았다. 시장 재임 시절부터 꾸준히 기부를 해 온 그는 현재까지 총 82억 달러(약 9조7621억 원)를 기부한 것으로 알려졌다. 트럼프 대통령은 40만 달러(약 4억7600만 원)의 연봉을 받고 있지만 전액을 사회에 기부하고 있다. 그도 2017년 11월 허리케인 ‘하비’ 피해 복구를 위해 사재 100만 달러(약 11억9000만 원)를 쾌척했다.

○ 타협 및 조율 부족·지나친 비용 우선주의 비판도


모든 기업가 출신 정치인이 성과를 내는 것은 아니다. 특히 성장 및 비용 절감을 중시하는 특유의 사고방식이 정무(政務) 감각, 타협 및 조율 능력이 중요한 정치 세계에 적합하지 않다는 지적도 상당하다. 김한권 국립외교원 교수는 “국가 지도자로 직면하는 문제는 기업가 시절과 차원이 다르다. 효율성을 우선시하던 기업인과 협상을 중시하는 정치인이 현안에 접근하는 방식도 판이하다”고 평했다.

기대가 높았던 만큼 성과를 보여주지 못하면 ‘기성 정치인과 차이가 없다’는 혹독한 비판이 뒤따른다. 기업가 출신 정치인이 단명하거나 실각하는 일도 잦다. ‘초콜릿 왕’으로 유명한 제과재벌 출신의 페트로 포로셴코 우크라이나 대통령(54)은 한 달 전 대선 결선투표에서 희극인 출신의 정치 신예 볼로디미르 젤렌스키(41)에게 대패했다. 5년 전 1차 투표에서 50%가 넘는 지지율로 낙승했지만 이달 20일 집무실을 비워줘야 한다.

이유는 지지부진한 경제와 부패 스캔들이다. 2014년 러시아의 크림반도 합병 및 친(親)러 성향 동부 분리주의자와의 내전으로 우크라이나 경제는 내내 침체를 면치 못하고 있다. 크림반도 병합 직전인 2013년 1833억 달러인 우크라이나 국내총생산(GDP)은 2017년 1122억 달러로 줄었다. 지난해 GDP도 1246억 달러 수준일 것으로 추정돼 당분간 전쟁 전 수준을 회복하는 일도 요원해 보인다. 포로셴코의 사업 파트너의 아들이 러시아에서 밀수한 부품을 자국 방산업체에 비싼 가격에 되팔았다는 스캔들도 대선 패배에 크게 기여했다.

아시아 경제위기의 진원지였던 태국 경제의 구원투수로 기대를 모으며 2001년 등장한 탁신 친나왓 전 태국 총리도 비슷하다. 화교 출신의 통신재벌인 그는 자신이 소유한 통신사를 싱가포르 국부펀드에 팔면서 무려 2조 원이 넘는 돈을 벌었다. 이 과정에서 한 푼의 세금도 안 냈다. 또 8명에 달하는 그의 형제자매, 처가 식구들까지 국가 기간산업을 독점하며 막대한 부를 축적한 것이 드러나자 민심이 돌아섰다. 2006년 9월 군부 쿠데타로 실각했고 13년이 지난 지금도 해외 도피 중이다. 3선에 성공했던 실비오 베를루스코니 전 이탈리아 총리도 탈세, 마피아 유착, 미성년자 성매매 의혹 등 각종 논란에 휘말렸고 2011년 퇴진했다.

2018년 2월 집권한 시릴 라마포사 남아프리카공화국 대통령은 이달 총선에서 간신히 연임을 확정지었다. 하지만 집권당 ANC 득표율은 1994년 후 25년 만에 최저를 기록했다. ANC 인사들의 거듭된 부패 스캔들과 경제난 때문이다. 그의 전임자 제이컵 주마 전 대통령은 무려 783건의 부패 혐의에 직면해 임기를 채우지 못하고 중도 사퇴했다. 이를 감안할 때 획기적인 성과를 내놓지 못하면 그의 입지 또한 장담할 수 없는 처지다.

○ 궈타이밍과 트럼프의 ‘평행 이론’

권력과 부, 두 마리 토끼를 잡는 일이 만만찮다는 전례에도 불구하고 궈 회장은 ‘대만의 트럼프’를 꿈꾸고 있다. 그는 기업가 경력, 종종 설화를 야기하는 화법, 상당한 나이 차가 있는 젊은 부인, 여성 편력 등 트럼프 대통령과 유사한 점도 많다. CNN은 “궈 회장이 트럼프 대통령의 대선 출마에 영감을 받았다는 현지 언론 보도가 있었다”고 전했다.

실제 그는 지난달 17일 대선 출마를 선언할 때 트럼프 대통령의 전략을 상당 부분 차용하는 듯한 모습을 보였다. 당시 그는 대만 국기가 그려진 파란색 야구모자를 쓰고 등장했다. 2016년 미 대선 때 트럼프의 트레이드마크였던 빨간색 야구 모자를 떠올리게 했다.

여성 비하 발언, 성추문 스캔들 논란 등도 유사하다. 그는 지난달 말 24세 연하인 부인이 대선 출마를 반대했다며 “후궁은 정치에 간섭해서는 안 된다”고 언급해 비판을 받았다. 그는 1974년 첫째 부인과 결혼했지만 1990년대 한 유흥업소 여성과 불륜에 빠졌다. 궈 회장이 이별을 통보하자 이 여성은 자신의 아파트에 몰래카메라를 설치해 ‘성관계 동영상’을 만들었다. 이를 빌미로 궈 회장에게 돈을 요구했지만 거부하고 경찰에 신고했다. 이 여성은 공갈 혐의로 체포돼 실형을 살았다. 2005년 첫 부인이 유방암으로 숨진 후에도 몇몇 유명 여성 연예인과 염문을 뿌리다 2008년 지금의 부인과 재혼했다.

궈 회장은 이달 1일 미 워싱턴을 방문해 백악관에서 트럼프 대통령과 약 50분간 면담했다. 그는 페이스북에 “오랜 친구 트럼프 대통령이 ‘대통령이 되는 건 힘든 일’이라고 말했다”는 후일담도 올렸다. 트럼프 대통령이 서명한 기념품, 대만 국기와 미국 국기가 나란히 새겨진 야구모자 사진까지 곁들이며 ‘역할 모델’과의 친분을 과시했다.

2016년 5월 강력한 반중(反中) 노선을 주창한 차이잉원(蔡英文) 총통이 집권한 후 중국과의 갈등 등으로 대만 경제 상황은 좋지 않다. 세계적 기업가인 궈 회장은 경제 전문가임을 과시하며 유권자들을 파고들고 있다. 특히 야당 국민당 후보 경선에 나선 그는 여당 민진당 지지자들을 공략하는 데도 열심이다. “중국 본토의 폭스콘 생산라인을 민진당 텃밭인 2대 도시 가오슝으로 이전하겠다”고 밝힌 것이 대표적이다. 과연 그는 트럼프 대통령처럼 이변에 이변을 거듭하며 최고 권좌에 오를 수 있을까.

위은지 wizi@donga.com·이윤태 기자
#대만 총통선거#기업가 출신 정치인#궈타이밍 폭스콘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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