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미경의 글로벌 인사이더]워싱턴에 벚꽃이 필 때

  • 동아일보
  • 입력 2017년 2월 20일 12시 06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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워싱턴의 벚꽃
워싱턴의 벚꽃

정미경 기자
정미경 기자
미국 워싱턴 스미소니언 박물관은 19개의 박물관, 미술관, 동물원 등을 포함하고 있는 종합 역사 보존체다. 흔히 말하는 스미소니언 박물관은 대박물관 격인 자연사 박물관이다.

19개의 박물관 중에 아시아 문화를 전문으로 전시하는 곳이 있다. 프리어 새클러 미술관이다. 미국 기업자이자 자선가인 찰스 랭 프리어와 아더 새클러의 기부로 지어진 미술관으로 한국, 인도, 터키 등 다양한 아시아 국가의 문화 유품이 전시돼 있다.

필자가 워싱턴 특파원 시절 한국관에서 고려시대 문화재 특별전을 열린다고 해서 가 본 적이 있다. 한국에서도 직접 본 적이 없는 고려청자를 감상하며 즐거운 시간을 보냈던 기억이 생생하다.

한국관을 둘러보고 나가려는데 바로 옆쪽에 중국관이 눈에 띄었다. 들어가 보니 한국관의 3,4배 되는 면적에 한국관과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다양한 문화재가 전시돼 있었다. 한국관은 주로 도자기 위주로 전시돼 지루한 감이 들었던 반면 중국관은 도자기는 물론 전쟁 도구, 왕실 물품 등이 전시돼 볼거리가 많았다.

중국관 옆쪽에 있는 일본관은 입이 딱 벌어질 정도였다. 중국관보다 더 큰 면적은 말할 것도 없이 조몬(繩文)부터 시작해 나라(奈良), 헤이안(平安), 에도(江戶), 메이지(明治)에 이르기까지 일본의 역사 시대가 일목요연하게 정리돼 있었다. 관람객도 가장 많았다. 프리어와 새클러가 애초에 이 미술관을 지은 것도 자신들이 소장하고 있던 일본 문화재를 많은 미국인들과 함께 공유하고 싶어서였다고 한다.

물론 한국관이 만들어진 역사가 가장 짧으니 문화재가 풍부하지 못한 것은 이해할만하다. 그러나 한국관은 중국관과 일본관에 비해 너무 초라한 모습이어서 미국인들의 눈에 비친 한국의 역사도 초라하게 보일 것 같아 씁쓸했다.

지난해 프리어 새클러 미술관에 걸려있는 동북 아시아 지도에 동해는 없고 일본해로 단독 표기돼 있다는 뉴스를 보고 ‘일본색이 강한 이 미술관에서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워싱턴 한복판의 미국 박물관에까지 속속 파고든 일본 문화 외교의 현장이었다.

서울보다 따뜻한 워싱턴은 지금쯤 벚꽃이 서서히 꽃망울을 터뜨릴 때다. 워싱턴은 사실 삭막한 도시다. 콘크리트로 지어진 연방 공공건물들이 촘촘히 들어선 회색의 도시다.

워싱턴 포토맥 강변 벚꽃
워싱턴 포토맥 강변 벚꽃

그런 워싱턴이 가장 아름다운 때는 봄이다. 워싱턴이 회색에서 연분홍으로 옷을 갈아입는다. 벚꽃 덕분이다. 다음달에는 성대한 벚꽃 축제가 열린다. 워싱턴에서는 특정 주제의 축제가 열리는 일이 거의 없는데 벚꽃 축제는 예외다. 벚꽃은 워싱턴의 명물이기 때문이다. 워싱턴은 매년 관광 수입의 35%를 벚꽃 축제 기간에 거둬들일 정도로 전국은 물론이고 전 세계에서 관광객이 몰려든다.

TV에서는 미일관계 역사를 재조명하는 특별 프로그램이 방송되고 벚꽃 퍼레이드, 연날리기 대회, 사케 시음식, 사쿠라 마쓰리 축제 등 일본 분위기가 물씬 풍기는 행사가 줄을 잇는다.

잘 알려졌다시피 워싱턴의 벚꽃은 1912년 3월 양국 우호의 상징으로 오자키 유키오(尾崎行雄) 당시 도쿄 시장이 선물한 벚나무 묘목 3000여 그루가 시초였다. 당시 벚꽃을 미국에 들여올 때 가쓰라-태프트 밀약으로 일본의 조선 지배를 인정해준 윌리엄 하워드 태프트 대통령의 부인 헬렌 여사가 막후에서 영향력을 행사했다.

벚꽃 축제는 날로 규모가 커진다. 매년 일본 기업의 후원이 늘기 때문이다. 벚꽃 축제는 워싱턴 시당국이 주최하지만 행사 비용의 대부분은 일본 기업이 부담한다. 일본 외무성의 요청에 따라 축제를 지원하는 일본 기업의 기부가 줄을 잇고 있다고 한다.

벚꽃 축제를 축하하기 위해 고위급 일본 정치인의 워싱턴 방문도 줄을 잇는다. 일본 정치인들은 축제만 참석하지 않는다. 미국 정가를 방문하고 미국 싱크탱크에서 일본 세미나를 연다. 매년 봄만 되면 전략국제문제연구소(CSIS), 카네기국제평화재단 등 워싱턴의 유명 싱크탱크에서 일본 외교안보 전략을 토론하는 행사가 동시다발적으로 열린다.

워싱턴 사쿠라 마쓰리 축제
워싱턴 사쿠라 마쓰리 축제

벚꽃 축제 기간 중 워싱턴의 한 호텔에서 아베 신조(安倍晋三) 총리의 여성 인재 활용 정책인 우머노믹스를 토론하는 세미나가 열려 가본 적이 있다. 일본군 위안부 강제 동원을 부정하는 아베 정부가 미국에 원정단까지 보내 자국의 여성 정책을 홍보하는 세미나를 연 것은 아이러니였다. 학술 교류 주제가 외교안보에 그치지 않고 미국인들이 좋아하는 여성 환경 인권 등의 이슈로 확대되고 있는 것은 일본의 문화 외교가 얼마나 치밀하게 진행되는지 보여준다.

일본은 2013년 미국인들이 사랑하는 존 F 케네디 대통령의 딸인 캐럴라인 케네디가 주일 미국대사로 부임했을 때 떠들썩했다. 일본은 캐럴라인이 일본에 부임도 하기 전에 워싱턴 주미 일본 대사관에서 축하연을 성대하게 열어줬다. 이 자리에는 캐럴라인은 물론 당시 존 케리 국무장관까지 참석했다. 일본 시를 낭독하고 다다미방에서 함께 차를 마시는 등 철저히 일본 전통 문화 위주로 진행된 행사에서 케리 국무장관은 “일본 문화 멋있다”는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교과서 동해 병기, 소녀상 건립 등 한일 역사 대결이 미국에서 펼쳐진지 오래다. 재미 한인사회는 역사 왜곡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열심히 일하고 있지만 언제나 힘든 싸움이다. 평소 다져놓은 일본의 소프트 외교 덕분에 많은 미국인들의 머릿속에 언제나 일본은 한국보다 가까운 나라이기 때문이다. 한국이 한류 열풍 덕분에 열심히 따라잡고 있지만 아직 한국의 대미 소프트 외교 수준은 일본에 비해 수십 년 떨어져 있다.

그래서 워싱턴 포토맥 강변을 따라 흐드러지게 벚꽃을 보며 눈이 호사했던 것은 사실이지만 마음은 복잡했다.

정미경 기자 micke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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