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기가 미래다]中企, 기술 독립 선언

  • 동아일보
  • 입력 2016년 11월 9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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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기업 납품 0%’ 도전 기업들

《 “창업 초기에는 매출의 80%가 대기업 납품에서 나왔습니다. 안정적으로 물량이 팔려서 편하기도 했지만 대기업 요구대로만 맞춰 주다 보니 몇 년이 지나도 기술력은 제자리걸음이었죠.” ㈜대안화학은 전자제품에 들어가는 플라스틱 필름을 전문으로 제조하는 중소기업이다. 1992년 창업 후 삼성전자 등 대기업 납품에 주력해 왔다가 2012년부터 본격적으로 대기업 의존도를 낮춰 나갔다. 윤윤식 대표(61)는 “대기업이 갑자기 물량을 줄이자 적자가 났고 결국 유휴설비들을 고철값에 팔아야 했던 적이 있다”며 “대기업만 바라보고 있다간 생존이 어렵겠다는 위기감이 들었다”고 말했다. 》
 

 이후 대안화학은 수출을 위해 중국과 말레이시아에 공장을 세우고 연구개발(R&D)에 적극적으로 투자하기 시작했다. 윤 대표는 “열 방출 기능이 뛰어난 필름을 자체 기술로 개발하며 시장을 선도하고 있다”며 “전체 매출에서 대기업 납품이 차지하는 비중도 자연스럽게 10% 아래로 내려갔다”고 밝혔다.

○ “대기업 의존도 높으면 한순간에 사라져”

 의료용 위생도기 업체인 ㈜아이젠도 대기업 의존도를 줄여가며 두각을 드러내고 있는 강소기업이다. 유병기 아이젠 대표(59)는 2003년 회사를 인수한 뒤 공격적으로 투자에 나섰다. 유 대표는 “사업 초기에는 생산 제품의 90%가 대기업에 납품하는 주문자상표부착생산(OEM) 방식이었다”며 “지금은 생산량의 30% 정도는 자체 브랜드를 달고 나간다”고 밝혔다. 관장 기능이 있는 비데가 시장에서 인기를 끌면서 지난해 아이젠의 매출은 230억 원을 기록했고, 올해는 300억 원까지 내다보고 있다.

 유 대표는 “대기업 의존도가 높은 중소기업은 대기업이 휘청거리기만 해도 한순간에 시장에서 사라진다”며 “변화가 생겨도 충격을 흡수할 수 있도록 한 업체와의 거래 비중을 10∼15%가 넘지 않도록 하고 있다”고 말했다.

 8일 중소기업청에 따르면 지난해 기준 국내 중견기업들의 전체 매출에서 대기업 거래 매출액 비중은 평균 74.8%에 달한다. 중견기업, 중소기업과 거래해 생긴 매출은 각각 16.3%, 8.9%에 그쳤다. 대기업에 모든 혜택이 우선적으로 돌아가고, 대기업이 흔들리면 중소기업은 줄 도산을 피하기 어려운 전형적인 구조다.

 최근 대기업들이 ‘저성장 국면’에 들어서고 조선·철강 산업 등에서 구조조정이 진행되면서 중견·중소기업들은 큰 위기를 겪고 있다. 경제 성장을 이끈 대기업 중심의 ‘낙수(落水) 경제’ 구조가 한계에 부딪혀 오히려 중소·중견기업의 성장을 제한하고 있는 것이다.

 현대중공업 대우조선해양 삼성중공업 등 이른바 조선 ‘빅3’와 거래하는 중소 협력업체들은 지난해 이후 20%가 넘게 폐업한 것으로 추산된다. 창원조선기자재협회에 따르면 올해 STX조선해양이 법정관리에 들어가자 협력사 100여 곳이 큰 타격을 입고 직원의 3분의 2가량이 일자리를 잃은 것으로 나타났다. 이 업체들은 오랜 기간 대기업 납품에만 의존하면서 경쟁력을 잃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 ‘대기업 일감’ 74.8%… “불공정 거래도 감수”

 8일 국회 의원회관에서 열린 ‘중견기업 육성을 위한 협력방안 세미나’에서는 이런 문제들이 논의됐다. 김경아 중견기업연구원 연구위원은 “대기업 위주의 경제구조는 중소기업 성장을 저해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김 연구위원은 “높은 대기업 의존도 때문에 다수의 중견기업이 불공정거래와 납품대금 지연 같은 불이익을 겪고도 어쩔 수 없이 이를 감수하고 있다”고 지적하며 “중견·중소기업의 대기업 의존도를 낮추고 수출을 돕는 정책이 집중적으로 추진돼야 한다”고 주장했다.

 한편 이날 세미나에서 김건열 KDB산업은행 부행장은 “내년부터 유망 중견기업 200개를 선정해 2조5000억 원 규모의 자금을 투입하는 ‘중견기업육성특별프로그램’으로 기업의 성장 사다리 구축을 돕겠다”고 밝혔다.

정민지 기자 jmj@donga.com
#대기업#납품#중소기업#기술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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