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동빈 기자의 세상만車]범블비, 키트는 다 어디로 갔지?

  • 동아일보
  • 입력 2018년 3월 29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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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위대한 개츠비’에서 주인공 제이 개츠비의 자동차로 등장한 노란색 듀센버그는
영화 전반에 걸쳐 중요한 역할을 한다.
영화 ‘위대한 개츠비’에서 주인공 제이 개츠비의 자동차로 등장한 노란색 듀센버그는 영화 전반에 걸쳐 중요한 역할을 한다.
석동빈 기자
석동빈 기자
“이제는 자동차가 주인공인 영화를 보기가 힘들어졌어요. 자동차에 대한 사랑이 식었다는 증거죠. 개츠비의 시절은 지나갔고 우리는 이제 새로운 시대를 준비하고 있습니다.”

최근 만난 한 자동차회사 고위 임원의 말이다. 실제로 미디어 속 ‘자동차의 벨 에포크(Belle Epoque·황금시대)’는 막을 내렸다.

스콧 피츠제럴드의 소설 ‘위대한 개츠비’에서 자동차는 중요한 배역을 수행한다. 1922년 미국 뉴욕 주변 고급 주택가를 무대로 펼쳐지는 이야기 속에 주인공 제이 개츠비는 모델명을 정확히 알 수 없는 영국산 노란색 롤스로이스를 몰고 다닌다. 리어나도 디캐프리오가 주연을 맡은 동명의 영화에서는 소설 속 롤스로이스와 닮은 1932년 미국산 듀센버그 ‘모델SJ’가 그 역할을 맡았다.

이 자동차는 손님들을 방탕한 파티로 실어 나르고, 옛 연인과의 가슴 설레는 데이트 장소를 제공하며, 비극적인 결말을 유발하는 뺑소니 사망사고까지 일으킨다. 개츠비의 상징인 동시에 쌍둥이 주인공인 셈이다.

1925년 이 소설이 출간된 이후 자동차는 소설과 영화의 주요 소재가 됐다. 촬영기술이 발달하면서 1968년 스티브 매퀸 주연의 영화 ‘불리트’에는 전설적인 자동차 추격전이 펼쳐졌다. 서늘한 긴장감을 불러일으키는 추격 장면은 이후 영화의 교본이 됐다. 기자의 기억 속에 자동차가 중요한 역할을 한 영화들은 다음과 같다.

△남과 여(1966년) △이탈리안 잡(1969년) △드라이버(1978년) △캐논볼(1981년) △쾌찬차(1985년) △터커(1988년) △폭풍의 질주(1990년) △델마와 루이스(1991년) △조슈아트리(1993년) △스피드(1994년) △성룡의 썬더볼트(1995년) △레이싱(1996년) △로닌(1998년) △더록(1996년) △택시(1998년) △식스티세컨즈(2000년) △분노의 질주(2001년) △드리븐(2001년) △마이너리티 리포트(2002년) △트랜스포터(2003년) △이탈리안 잡(2003년·리메이킹) △아이로봇(2004년) △카(2006년) △트랜스포머(2007년) △러시 더 라이벌(2013년) △니드 포 스피드(2014년) △베이비 드라이버(2017년) △모놀리스(2017년)

기억력의 한계와 이들 영화의 속편까지 모두 관람한 것을 감안하면 지난 30여 년간 영화 속의 자동차를 보러 매년 3, 4차례는 영화관을 찾은 것 같다. 그런데 2002년 마이너리티 리포트에 디스토피아적인 자율주행차가 나온 이후부터 분위기가 바뀌기 시작했다.

여전히 신나는 자동차 영화가 나오기는 하지만 자동차 자체가 주인공인 영화는 크게 줄었고, 표현 방식도 교감하고 즐기는 대상이 아니라 단순한 이동수단이나 소품에 국한되고 있다. 과거엔 자동차를 통해 자유를 얻고 화해하며 새로운 사랑이 싹트고 치유된다. 예를 들자면 영화 ‘이보다 더 좋을 순 없다’(1998년)에 등장하는 사브 ‘900 SE 터보 컨버터블’은 괴팍한 주인공과 주변 인물들을 화해시켜주는 매개체 역할을 한다.

하지만 2000년대 후반부터는 자동차에 이런 배역은 더 이상 주어지지 않았다. 영혼 없이 달리고 부서지면 그만이다. 10만 km를 타도 고장 나지 않는 자동차가 상식이 된 1990년 이후 태어난 세대, 어릴 때부터 물질적 풍요와 컴퓨터, 스마트폰을 접한 세대는 더 이상 인격화된 자동차에 공감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런 현상은 영화가 아닌 다른 미디어에서도 폭넓게 나타난다. 자동차쇼의 지존이었던 영국 ‘톱기어’와 예전 톱기어 출연진이 옮겨간 아마존 ‘그랜드 투어’의 인기가 시들하다. 국내 자동차 TV 프로그램은 2, 3년 전에는 최대 5개까지 늘어난 적도 있었지만 지금은 전멸 상태다.

과거 일본 자동차 마니아들이 즐겨봤던 ‘베스트 모터링’ 시리즈도 오래전에 중단됐고, 1990년대와 2000년대를 풍미했던 △이니셜D △완간 미드나이트 △리스토어 개러지 같은 일본 ‘오타쿠’ 자동차 만화도 찾아보기 힘들다. BMW가 2001년부터 신차를 주제로 선보인 단편영화나 자동차 묘기였던 켄블록 짐카나 시리즈도 존재감이 크게 줄었다.

음악도 마찬가지다. 한국인이 사랑하는 버티 히긴스의 ‘카사블랑카’에는 쉐보레가, 이글스의 ‘호텔캘리포니아’에선 메르세데스벤츠가 나온다. 수많은 팝송에서 벤츠 포르셰 혼다 포드 등이 상징적으로 등장하지만 이 역시 거의 사라졌다. 이런 미디어를 통해 ‘자동차 세계관’을 형성하던 소비자들은 늙어버렸다. 지금의 10대, 20대는 더 이상 자동차를 보기 위해 영화관을 찾지 않는다. 자동차의 성능을 높인다고 더 많이 구입하지도 않는다.

자동차 회사들엔 슬픈 사건이다. 그런데 자율·전기·수소자동차의 시대가 오면 자동차를 통한 이동이나 활용은 훨씬 늘어날 것으로 전망된다. 자동차 실내 공간과 그 안에서 지내는 시간은 새로운 사업 기회를 창출할 것이 확실하다. 브랜드의 가치도 크게 희석되기 때문에 창의적인 접근을 시도한다면 한국 자동차산업은 선두권으로 올라설 수도 있다. 위기와 기회는 항상 같이 붙어 다닌다. “새로운 시도를 준비하고 있다”는 그 임원의 말에 희망을 걸어본다.
 
석동빈 기자 mobidic@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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