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문판매로 ‘아모레’ 시대 개막… 여성일자리 창출하며 고속성장

  • 동아일보
  • 입력 2015년 11월 4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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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모레퍼시픽 창업자 서성환 평전/ 나는 다시 태어나도 화장품이다]
<7>여성과 함께 이룬 유통혁명

화장품 유통 구조 문제를 고민하다 떠올린 방문판매 제도는 태평양의 고속 성장을 이끈 마케팅이었고 오늘의 아모레퍼시픽을 만든 기반이었다. 아모레퍼시픽 제공
화장품 유통 구조 문제를 고민하다 떠올린 방문판매 제도는 태평양의 고속 성장을 이끈 마케팅이었고 오늘의 아모레퍼시픽을 만든 기반이었다. 아모레퍼시픽 제공
1960년대 화장품업계의 전근대적인 유통 구조는 서성환 아모레퍼시픽 창업자에게도 큰 고민이었다. 해결책을 찾던 그는 지정판매소 제도를 도입한 ‘태평양화장품판매주식회사’를 설립했다. 화장품 제조회사가 만든 최초의 판매회사였다. 하지만 문제는 여전했다. 약국이나 양품점, 일반 소매상 등을 지정판매소로 선정했지만 겸업일 뿐이라 제품 관리에 신경을 쓰지 않았다. 그는 결국 지정판매소 제도를 포기하고 판매회사도 청산했다.

유통 구조 문제를 극복할 새로운 방안을 다시 모색하던 그는 방문판매 제도를 떠올렸다. 방문판매의 핵심은 제품, 조직, 인력이었다. 태평양은 이 중 제품력에 한해서는 자신이 있었다.

방문판매 전용 제품군을 개발한 태평양은 상금을 내걸고 전 사원을 대상으로 브랜드를 공모했다. 100여 편의 응모작 중에 하나가 채택됐다. 아모레(Amore·이탈리아어로 ‘사랑’)였다.

아모레는 1959년 이탈리아 영화 ‘형사’에 삽입된 주제가의 첫 구절이었다. 그는 인간을 영원히 젊게 만드는 사랑이야말로 아름다움을 지향하는 화장품 이미지와 어울린다고 생각했다. 국내 화장품의 대명사처럼 입에 오르내리게 된 아모레는 그렇게 탄생했다.

다음으로는 판매망 구축이 중요했다. 그는 전국을 행정구역에 따라 바둑판처럼 구역을 나누고 특약점을 설치했다. 한 지역의 판매망이 자리를 잡고 확대되어 가면 또다시 그 구역을 세분해 거미줄 같은 조직을 만들었다. 영업소는 빠른 속도로 늘었다. 1980년에는 특약점과 영업소가 총 664곳, 활동하던 판매원은 1만6571명에 이르렀다.

방문판매의 성과를 좌우하는 것은 우수한 판매원이었다. 1960년대는 전쟁의 여진이 가라앉지 않은 시기였다. 전쟁으로 남편을 잃은 여성만 37만 명에 달했다. 가정을 책임져야 하는 여성에게 일자리를 제공하는 것은 회사에도, 그들에게도 좋은 일이었다. 지역 여론에 영향을 미칠 수 있도록 고학력 여성들도 선발해 교육했다. 덕분에 화장품 판매원에 대한 이미지는 다른 직종의 방문판매원과는 크게 달랐다. ‘아모레 아줌마’라고 불리는 이들에게 지역 주민들은 기분 좋게 대문을 열어줬다.

서성환 창업자는 ‘아모레 3대 원칙’을 설정하고 이를 엄격하게 지키도록 했다. ‘방문 판매 원칙’ ‘정찰 판매 원칙’ ‘구역 준수 원칙’이 그것이었다. 방문판매를 시작한 후 3년 동안 그는 집에서 잠을 잔 적이 거의 없었다. 언제나 현장에 함께 있으려 노력했기 때문이다. 1969년 그의 수첩 한 장에는 이런 메모가 담겨 있다.

‘우리가 살기 위하여 소비자를 보호하자. 정확한 것은 정직한 것이다. 고객은 언제나 정직하다. 무관심이 죄다. 관심을 갖고 자기 업무에 종사하라.’

방문판매 제도는 태평양의 고속 성장을 이끈 주역이었고 오늘의 아모레퍼시픽을 만든 산파였다. 태평양의 방문판매는 사람을 아끼고 구성원을 존중해 주는 기업 문화가 있었기에 가능했다. 서성환 창업자가 세상을 떠나고 유족은 기금을 조성해 저소득 한부모 여성 가장의 창업을 지원하는 ‘희망가게’ 사업을 시작했다. 50년 전 방문판매라는 제도를 통해 전쟁의 아픔으로 생계를 짊어지게 된 여성들에게 손을 내밀었던 창업자의 정신을 새롭게 계승해 나가기 위해서였다.

정리=박선희 기자 teller@donga.com
#아모레퍼시픽#서성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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