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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스크 진단/유재동]‘눈먼 돈 나눠먹기’ 정부 인증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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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스크 진단/유재동]‘눈먼 돈 나눠먹기’ 정부 인증제

유재동기자 입력 2017-08-21 03:00수정 2017-08-21 0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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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재동 경제부 차장
‘벤처·혁신기업 1년에 1만 개씩 발굴해 인증.’

노무현 정부 때인 2006년 초 산업자원부가 이해찬 총리에게 보고한 내용이다. 그 후 중소기업청장은 담당 국장들에게 ‘벤처기업 ○개 늘리기’ ‘혁신기업 ×개 육성하기’ 같은 개별적인 미션을 줬다. 그러면서 미션의 성공 여부를 인사 고과에 반영하겠다고 말했다. 사실상 찾아오는 기업들에 정부의 인증 도장을 마구 찍어주라는 지시였다.

이런 ‘내던지기’식 정책 발표와 ‘짜맞추기’식 업무 지시는 다음 정권들도 마찬가지였다. 그 덕에 지금 한국은 통계만 보면 독보적인 ‘벤처 왕국’이 됐다. 현재 정부가 인증한 벤처기업 수는 3만4000개, 혁신형 중소기업은 3만3000개를 헤아린다. 하지만 이 중 우리가 머릿속에 그리는 ‘알짜 벤처기업’ ‘진짜 혁신기업’은 극히 일부다. 벤처기업 중 제대로 기술력을 인정받아 민간투자를 받은 곳은 3%에 그치고, 상당수는 동네 편의점 같은 구멍가게 수준에 머물면서 정책자금으로 연명하고 있다. 그나마 20%는 자본이 잠식된 ‘좀비기업’이다. 선의(善意)에서 시작된 정책이 이런 황당한 결과로 이어진 데는 이유가 있다.

외환위기 직후 도입된 벤처 인증제는 시작과 동시에 기업들의 신청서가 쇄도할 정도로 반응이 뜨거웠다. 한 번 도장만 받으면 나랏돈으로 온갖 금융 세제 지원을 꾸준히 받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더 인증을 내줄 곳이 바닥나자 정부는 ‘혁신형 중소기업’이라는 새로운 도장을 파냈다. 내용은 거의 엇비슷하고 이름만 다른 것이었다. 정부 지원에 목마른 기업들 사이에서 인증을 쉽게 받기 위한 ‘공무원 줄대기’가 판을 쳤고, 심지어 이를 대행해주는 산업마저 생겨났다. 하지만 정부는 모른 체했다. 도장 하나로 기업들을 줄 세우는 규제의 칼자루에 흐뭇해하면서 한편으론 ‘혁신기업 ○만 개 돌파’ 식의 대국민 홍보에 여념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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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계란 파동으로 불거진 친환경 인증제도 ‘눈먼 돈 나눠먹기’란 차원에서 본질은 같다. 친환경 인증을 많이 내줄수록 수익이 늘어나는 인증 대행업자들은 기준에 미달해도 덮어놓고 인증마크를 내줬다. 농가들도 인증받은 계란을 더 비싼 값에 팔면서 최대 3000만 원의 정부 직불금을 받아갔다. 그러면서 약속을 어기고 ‘친환경 닭장’에 초강력 살충제를 뿌려댔다. 농가의 부정행위를 알면서도 내버려둔 정부는 대신 퇴직 관료들을 인증업체에 꽂아 넣으면서 조직의 잇속을 챙겼다. 이쯤 되면 우리에겐 너무나 익숙한 각본 아닌가. 당사자가 은밀하게 유착돼 있는 지금의 인증제도는 도덕적 해이가 독버섯처럼 만연하기 딱 좋은 환경이었다.

이번에도 결국 모두가 부당이득을 챙기는 사이 납세자들만 손해를 봤다. 지난 20년간 가짜 친환경 농가나 ‘무늬만 벤처’로 잘못 흘러간 예산이 얼마가 될지 가늠도 하기 힘들다. 식탁 안전에 대한 소비자의 불신과 공포도 한동안 지속될 것이다. 하지만 가장 큰 손실은 따로 있다. 앞으로는 정부의 인증 마크를 누구도 믿지 않을 거란 사실이다. “정부마저 날 속였다”고 느끼는 국민들의 배신감은 영영 치유가 어려울 수 있다.

정부는 왜 소비자들이 마트에서 비싼 돈을 주고도 살충제 범벅인 친환경 계란을 먹게 됐는지, 왜 수만 개의 혁신기업을 갖고도 우리 젊은이들이 최악의 청년실업에 내몰렸는지를 설명해야 한다. 설명 못 할 당국자라면 브리핑 마이크를 반납하고 지금이라도 당장 물러나는 게 낫다.

유재동 경제부 차장 jarrett@donga.com
#벤처#혁신기업#정부 인증제#친환경 인증제도#살충제 달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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