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체메뉴
[스토리 &] 창조경제도 놀란 예술경제
더보기

[스토리 &] 창조경제도 놀란 예술경제

동아일보입력 2013-08-13 03:00수정 2013-08-13 11:02
뉴스듣기프린트
트랜드뉴스 보기
공기관 KOTRA와 미술가 한젬마씨가 손잡았더니 《“저희 사옥에 갤러리를 새로 여는데….” 설치미술가 한젬마 씨(43·여)는 지난해 9월 초 전화를 받았다. KOTRA 직원이었다. 그는 KOTRA 창립 50주년을 맞아 서울 서초구 염곡동 본사에 ‘오픈 갤러리’를 마련한다며 한 씨에게 명예관장을 맡아 달라고 제안했다. 여러 기업들과 함께 전시 프로젝트를 추진해 본 경험은 많지만 공공기관의 제안은 다소 의외였다. 한 씨는 단지 이름만 올려놓는 ‘얼굴마담’ 같아 썩 내키지 않았다. 하지만 일단 만나기로 하고 며칠 뒤 KOTRA 본사를 찾았다.》
지난해 12월 KOTRA 오픈 갤러리에 전시된 작가 김석 씨의 ‘로봇태권브이’. 중소기업 유진로봇은 이 작품을 만드는 데 도움을 주고 제품 마케팅에도 활용하는 ‘매칭기업’으로 참여했다.

KOTRA 측은 한 씨에게 오픈 갤러리를 여는 취지를 설명했다. 공공기관의 사회공헌활동을 강화하고 전시공간이 없는 예술가들에게 기회를 마련해주기 위해서라고 했다.

“너무 낡은 트렌드예요. 공기업이나 공공기관이 갤러리를 열어 사회에 공헌한다는 건 이미 10년 전에 유행했던 일입니다.”

3월 KOTRA 오픈 갤러리에서 열린 ‘중소기업 라이프전’ 관람객들이 전시작품을 둘러보고 있다. 가정집 내부처럼 꾸민 공간에 그릇, 냄비 등 중소기업 제품을 배치해 친숙함을 느끼게 했다. KOTRA 제공
그는 역으로 “사장님께 제 구상을 말씀드릴 수 있게 해 달라”고 제안했다. 며칠 뒤 오영호 사장과 임원들 앞에서 한 씨는 한 시간 동안 오픈 갤러리 운영방안을 설명했다. 갤러리를 중소기업들의 문화경영 활동을 전파하고 경직된 공공기관의 조직문화를 개선하는 장(場)으로 활용하자는 의견이었다. 그는 “꿈과 감성을 담은 제품이 경쟁력을 확보하는 시대”라며 “오픈 갤러리를 통해 국내 중소기업 제품의 가치를 높여 해외시장에서 당당히 자리매김할 수 있게 하자”고 제안했다. 자신의 직책도 딱딱한 명예관장 대신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로 불러달라고 요청했다.

주요기사

오 사장은 한 씨의 제안을 흔쾌히 받아들였다. 해외출장을 나갈 때면 짬을 내 현지 미술관을 둘러볼 정도로 예술에 관심이 많은 오 사장이 보기에 한 씨의 의견은 딱딱한 공공기관의 문화를 바꾸기에도 제격이었다. 이후 일정은 일사천리로 진행됐다. 그해 12월 4일부터 ‘예술과 중소기업의 만남’을 주제로 첫 전시회를 연다는 계획도 잡았다.

문제는 그때부터였다. 중소기업 제품을 예술작품의 소재로 활용해 가치를 높여보겠다는 한 씨의 생각을 정작 중소기업들은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담당자에게 협조를 구하면 “회사 규모가 크지 않아서…”라며 고개를 저었다. 그러나 속내는 추가 비용이 들어갈 것을 걱정해서였다.

한 씨는 그럴수록 이번 기회에 사회공헌과 예술을 바라보는 기업들의 인식을 바꾸겠다고 마음먹었다. 어렵사리 몇몇 기업의 협조를 얻어 비누, 유리테이프 같은 제품들을 받아왔다. 한 씨의 취지에 공감한 작가들은 이 제품들을 소재로 그럴 듯한 예술품을 만들어냈다.

전시회 첫날 KOTRA의 초청을 받은 중소기업 대표들은 자사 제품들이 멋진 예술작품으로 탈바꿈한 것을 보고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을 지었다. 한 씨는 “예술가들이 흔히 소재로 삼는 나사, 붓, 끈이 중소기업 제품인 것처럼 예술가와 중소기업은 끈끈하게 연결돼 있다”며 “이제 예술을 자선활동 수단이 아닌 마케팅 관점으로, 예술가들을 문화투자의 파트너로 봐 달라”고 당부했다.

설치미술가 한젬마 씨(오른쪽에서 두 번째)가 오영호 KOTRA 사장(오른쪽)과 관람객들에게 전시작품들을 소개하고 있다. KOTRA 제공
효과는 컸다. 기업들은 “우리 제품도 써 달라”며 먼저 찾아왔다. 올해 3월에는 중소기업 제품을 설치미술로 표현하는 ‘중소기업 라이프전’을 열었다. 전시회 주제도 장애미술인전, 한류 미술 공모전 등으로 범위를 넓히는 한편 터키 이스탄불 등 해외 전시회도 추진하기로 했다. 김영세 이노디자인 대표와 디자이너 지망생들은 중소기업 제품 디자인을 바꿔보는 새로운 방식의 프로젝트도 시도하고 있다.

KOTRA 직원들의 생각도 바뀌기 시작했다. 처음엔 “번거롭게 갤러리는 왜 만들지”라며 고개를 갸웃거리던 이들도 한 씨에게 새로운 아이디어를 제안하기 시작했다. 오픈 갤러리는 이제 KOTRA를 찾는 외부인에게 가장 먼저 소개하는 명소가 됐다. 다음 달이면 한 씨가 KOTRA 일을 맡은 지 1년이 된다. 그는 중소·중견기업 제품을 볼 때마다 작품에 활용할 방법을 고민한다.

“KOTRA는 바싹 마른 스펀지 같아 어떤 내용이든 쭉 빨아들일 수 있는 흡수력을 지닌 곳이더군요. 앞으로도 예술과 기업을 조화시키는 새로운 시도를 계속해 볼 생각입니다.”

박창규 기자 kyu@donga.com

당신이 좋아할 만한 콘텐츠


기사 의견

   

주요뉴스

1/3이전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