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F1년/물꼬터진 경제 개방]

  • 입력 1998년 11월 12일 19시 15분


김대중(金大中)대통령은 취임이후 최근까지 1백여명의 외국 기업인들을 접견했다. 브리티시텔레콤 시티뱅크 볼보 모토롤라 벨캐나다 로스차일드 GM 모건스탠리 등 한국을 찾아온 세계 유수기업의 책임자들은 대부분 김대통령을 만날 수 있었다.

이중에는 국제통화기금(IMF) 사태 이전 같았으면 경제부처 국과장을 만나기도 어려웠던 기업인들도 상당수 포함돼 있다. 로버트 루빈 미국재무부장관이 골드만 삭스의 회장 시절 방한중 한국 경제관료의 냉대를 받았던 것에 비하면 엄청난 변화가 일어난 것이다.

청와대의 강봉균(康奉均)경제수석비서관과 박선숙(朴仙淑)부대변인은 김대통령이 외국기업인들을 만날 때마다 되풀이하는 말을 하도 많이 듣다보니 줄줄 외울 정도가 돼버렸다. “개혁과 외자유치만이 한국의 살 길이다. 외국자본이 투자하기 좋은 여건을 만들어….”

IMF 체제이후 보통사람들이 외국기업을 보는 눈도 바뀌었다.

프랑스계 할인점 까르푸는 IMF사태 직후 한때 외국자본 배격운동으로 큰 타격을 입었다. 까르푸 매장이 있는 일산신도시 일부 초등학교에서는 학생들에게 “외국 기업인 까르푸에 가서 물건을 사면 안된다”고 가르쳤다. 일부 아파트 부녀회가 까르푸 불매운동까지 벌이는 바람에 까르푸 쇼핑백을 들고 아파트단지로 들어가기가 어려울 정도였다고 한다.

까르푸 홍보팀 이지현(李知炫)대리는 “까르푸는 한국인에게 도움을 주는 외국자본”이라며 “매장 상품의 95%가 한국산이고 까르푸 매출이 늘면 그만큼 한국인 고용이 늘어나고 한국에 세금도 많이 내게 된다”고 말했다.

이대리는 “지금은 고객들 사이에 물건 좋고 값싸다”는 인식이 확산돼 영업이 호조를 보이고 있다고 전했다. 까르푸는 2000년까지 외자 2억달러를 들여와 매장을 늘릴 계획을 세워놓고 있다.

이탈리아의 세계적 스포츠 의류 신발 제조업체인 필라의 한국법인인 필라코리아도 지난해말 ‘국산품 애용운동’으로 상당한 곤욕을 치렀다. 주요 고객인 중고등학생들이 “친구들이 필라 브랜드를 보고 손가락질 한다”며 외면하는 바람에 매출이 절반 이하로 격감했다.

필라코리아 마케팅팀의 정소흔(鄭素欣)씨는 “IMF이후 소비자들이 경제공부를 많이 해 국산품이냐 외제냐를 가리는 기준이 달라졌다”고 분석했다.

그는 “삼성전자 영국공장은 영국에 세금을 내고 영국사람들을 고용하는 영국기업이고 필라코리아는 한국의 근로자를 채용하고 한국에 세금을 내는 한국기업”이라고 말했다.

올해 프로야구 MVP 상은 외국 용병인 도미니카 출신의 타이론 우즈에게 돌아갔다. 체육계 인사들은 “몇년전 같으면 아무리 실력이 뛰어나더라도 외국인에게 이런 상을 주기는 힘들었을 것”이라고 말한다. IMF를 계기로 인종 국적에 관계없이 실력을 인정해주는 국제화 사고가 넓게 확산돼가고 있는 증거라고 할 수 있다.

기획예산위원회는 내년말까지 한국전력 등 공기업을 외국기업에 매각해 1백억달러 이상의 외자를 들여올 계획이다. IMF 이전 같았으면 전력 가스 통신 등 국가 기간산업을 외국인에게 넘긴다는 것은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기획예산위 산업자원부 등 경제부처들은 외국언론만을 상대하는 외신공보관을 신설했다.

서울 리츠칼튼호텔 에릭 스완슨이사는 “한국인들이 외국인을 대하는 태도가 과거와 크게 달라졌다”면서 “택시운전사들도 과거에 비해 외국인에게 친절해졌다”고 말했다.

실제로 외국기업에 대한 적대감이 상당히 누그러지면서 외국인들의 한국경제에 대한 신뢰도도 점차 개선되고 있다.

최근 미국 메릴린치증권사는 투자자들에게 한국 등 아시아 신흥시장 투자비중을 1.73%에서 1.95%로 확대할 것을 권고했다.

실제로 10월 1∼19일 국내증시에 총 5억달러의 외국자금이 유입됐다. 9월 월간유입액(2억5천만달러)의 2배에 달하는 규모.

국가별로는 미국계 8천만달러, 영국계 7천만달러, 아일랜드계 7천만달러, 말레이시아계 역외펀드 7천만달러 등 자금의 국적도 다변화하고 있다.

그러나 외국인 투자자들에게 아직도 한국은 선진국들과 비교해 기업을 운영하기에 불편한 나라다. 최근 미국의 투자기금 얼라이언스 캐피털이 한국에 2억달러를 투자하겠다고 나섰지만 금융당국은 “규정상 곤란하다”며 허가하지 않았다. 당국은 여러가지 규정을 고치는데 시간이 많이 걸린다는 입장이었다. 외국인 투자 원스톱 서비스(일괄처리) 제도가 가동되고 있는지를 의심스럽게 하는 사례다.

학연 지연으로 얽힌 연고주의, 불투명한 기업회계, 관료주의, 정경유착을 비롯한 부패도 외자유치를 가로막는 주요인이 되고 있다고 외국 언론은 보도하고 있다.

이두원(李斗遠) 연세대교수는 “IMF 사태를 계기로 단순히 법과 제도만을 바꾸는 개방이 아니라 의식과 관행이 달라지는 본질적인 개방이 이루어져야 한다”고 말했다.

〈임규진·이명재기자〉mhjh22@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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