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F1년/구조조정]3백개社 넘게 정리

  • 입력 1998년 11월 11일 19시 26분


“기업을 이렇게 죽이다가는 국제통화기금(IMF)체제가 끝난 뒤 무엇으로 먹고 살겠느냐.”

“최고의 신랑후보였던 은행원들이 이 지경에 이를 줄은 몰랐다.”

지난 1년간은 이런 불만과 푸념이 절로 나올 정도로 가혹하게 기업과 금융부문의 구조조정을 요구한 시기였다. 그 안의 종사자들은 유례없는 시련과 변화를 겪어야 했다.

그러나 이는 피할 수 없는 선택이었다. IMF를 불러들인 가장 큰 원인의 하나가 기업의 과다차입을 통한 몸불리기였고 금융기관은 원칙없는 대출과 자금운용으로 결국 외환위기를 불렀기 때문이다.

아직 구조조정이 끝난 것도 아니다. 여전히 실물경제는 제대로 작동하지 않고 있다. 특히 5대 그룹의 구조조정은 국내외로부터 ‘더디고 미흡하다’는 평가를 면치 못하고 있다. 금융기관의 선진화도 아직은 멀다.

▼미완의 금융 구조조정〓종합금융사 16개를 시작으로 은행 증권 보험 투신 리스사 등 금융권 전체에서 모두 97곳이 문을 닫았다. 5개 은행 퇴출로 은행불사(不死)의 신화가 깨졌다. 6개 은행은 합병작업중이고 3개 은행은 합병추진중이며 서울 제일은행은 외국인 임자를 찾고 있다.

합병여부와 관계없이 대부분의 금융기관이 작년말 대비 10∼40%의 인원을 줄였다. 올해 직장을 떠난 금융인은 약 3만명에 이른다.

이런 구조조정 추이와 관련, 미셸 캉드쉬 IMF총재는 지난달 워싱턴에서 열린 연차총회에서 “한국이 구제금융을 받고 있는 나라들의 모범이 되고 있다”고 평가했다.

하지만 세계적 신용평가회사인 무디스는 IMF총회 직후 “한국의 금융시스템은 사실상 파산상태에 있다”고 발표했다. 국제기준으로 한국 금융기관 부실여신이 1백77조원에 이르며 기업 구조조정 과정에서 부실이 더 늘어날 수 있다는 게 이유였다. 금융 구조조정을 아무리 잘 해도 기업 구조조정이 이뤄지지 않으면 소용없다는 판단이 깔려 있다.

한국개발연구원(KDI)의 신인석(申仁錫)연구위원은 “IMF가 어떻게 평가하든 무디스의 평가가 좋아지지 않는 한 우리 금융기관들의 외화차입은 제한적일 수밖에 없다”며 “금융기관의 외화차입 능력이 개선되지 않는 한 외환위기의 위험성은 남아 있다“고 말한다.

금융 구조조정 과정에서 IMF의 고금리 처방과 국제결제은행(BIS)기준 자기자본비율이라는 ‘생사의 잣대’ 때문에 금융경색이 심화, 실물경제의 기반이 더욱 흔들렸다.

올초 30%에 육박하던 고금리가 최근 10%대로 떨어지고 정부의 부실채권 매입으로 은행권의 BIS비율도 개선됐지만 신용경색 현상은 쉽게 풀리지 않고 있다

금융 구조조정은 국민부담도 가중시키고 있다. 정부가 금융 구조조정 비용으로 책정한 64조원의 원금 중 일부와 이자를 합쳐 수년간 국민이 부담해야 할 규모는 75조원 정도로 추산되고 있다.

그럼에도 이 64조원만으로 우리나라의 금융시스템이 정상화할 지도 불확실하다. 최근 미국 투자은행인 메릴린치는 25조∼34조원을 더 투입해야 한다는 보고서를 냈다.

정부는 9월말로 1차 금융 구조조정을 마무리했다고 평가하지만 부실 투신사와 보험사의 추가 처리문제 등 해결되지 않은 과제가 적지않게 남아 있다.

금융 부실화와 이에 따른 경제위기의 주요인으로 지적되는 관치금융 행태가 사라졌다고 보기 어려운 사례도 남아 있다.

▼균형 잃은 기업 구조조정〓외형상으로는 5대 그룹을 제외한 기업 구조조정에 상당한 진전이 있었다고 평가된다.

6∼64대 그룹 중 부도 협조융자 등으로 20여개 그룹이 사실상 해체, 주력사 한두개만 남아 전문기업이나 초미니그룹으로 탈바꿈했다. 또 이 과정에서 14개 그룹의 43개 계열사와 중견대기업 29개사가 기업개선작업(워크아웃)대상에 포함돼 93개 기업이 매각되고 2백50개 기업이 정리됐다.

중소기업의 경우엔 2만여개가 부도났고 1만3천여개가 워크아웃 과정에 있다.

한 시중은행장은 “기업 저변에서는 눈에 보이지 않게 엄청난 구조조정이 이뤄졌다. 이제 웬만한 한계기업은 정리됐다고 본다. 부도업체수가 줄어드는 것도 그 때문”이라고 평가했다.

그러나 기업들이 진입과 퇴출의 시장원리에 의해 자발적으로 구조조정을 추진했다기 보다는 관치금융 협조융자 등에 의해 마지 못해 선별적으로 구조조정을 당했다는 지적도 많다.

IMF체제 이후 해태 뉴코아 진도 신호 한화 동아건설 우방 등 11개 그룹이 2조9천9백27억원의 협조융자를 받았다. 긴급자금을 수혈받아 연명하는 것은 진정한 기업구조조정으로 볼 수 없다고 전문가들은 말한다.

세계은행(IBRD)의 스티엔 클라센 수석연구원은 지난달 한 세미나에서 “한국기업의 40%가 기술적 파산상태에 직면해 기업부실이 다시 금융개혁에 걸림돌로 작용할 가능성이 높다”고 말했다.

뿐만 아니라 사실상 한국경제를 주도하는 5대 그룹은 계열사 정리나 빅딜(대규모 사업교환)에 미온적인 입장을 보이고 있어 구조조정이 양극화하고 있다.

6월 5대 그룹 20개 계열사가 퇴출대상으로 분류됐으나 대부분이 매출비중이 극히 낮은 소규모 계열사로 그나마 퇴출보다는 타계열사 합병방식으로 정리됐다.

5대 그룹은 주거래은행에 제출한 재무구조개선계획에서 계열사수를 30∼40% 줄이고 내년말까지 부채비율을 200%로 낮추겠다고 약속했다.

그러나 지난달 공정거래위원회 조사에 따르면 기업퇴출이 본격화한 4월이후 삼성은 2개, 대우와 LG가 각각 1개의 계열사를 늘렸다.

5대 그룹은 또 부채비율 감축에 예외 인정을 요구하면서 아직까지 부채비율 감축이나 과잉시설 해소 노력을 보여주지 않고 있다.

연초부터 추진해온 빅딜협상도 경영권에 대한 집착 때문에 여전히 난항을 겪고 있다.

이에 대해 영국 파이낸셜 타임스지는 최근 6∼64대그룹의 구조조정을 ‘잰 걸음’으로, 5대그룹의 구조조정을 ‘게걸음’으로 표현하기도 했다.

기업 구조조정을 지켜보는 국내외의 공통된 시각은 문어발식으로 사업을 확장하는 선단식 경영, 빚으로 기업을 키우는 차입경영 등 재벌체제로는 더 이상 한국경제가 지탱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과제〓남일총(南逸聰)KDI연구위원은 “향후 5대 그룹 구조조정의 과제는 부실기업의 과감한 퇴출과 회생가능한 기업에 돈이 흘러갈 수 있도록 재무구조를 빨리 개선해 주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금융 구조조정에 관해 최공필(崔公弼)금융연구원 연구위원은 “정부가 할 수 있는 일은 거의 끝났다”며 “앞으로는 금융기관 스스로가 위험관리체제를 갖추는 일에 주력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한동안 논란이 일었던 구조조정과 경기진작의 선후 시비와 관련해서는 구조조정 없이는 경기진작도 없다는 쪽에 더욱 무게가 실리고 있다. 이는 정부의 소비진작책 등이 별 실효를 거두지 못하고 있는데서 입증되고 있다.

〈이영이·송평인·박현진기자〉yes202@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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