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F1년/소득계층 양극화]무너지는 「중산층」

  • 입력 1998년 11월 8일 19시 23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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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 서울 용산의 한 결혼식장. 웨딩드레스를 곱게 차려 입은 큰 딸의 손을 잡은 김모씨(52·경기 구리시 교문동)는 피아노 선율에 맞춰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다.

김씨는 이날 ‘하루 동안의 자유’를 얻어 딸의 혼례를 가졌다. 그는 자동차부품업체 원목수입업체 등 3개 중소기업을 운영하다 연초에 60억원대의 부도를 내고 부정수표단속법 위반으로 구속 수감됐다.

신혼여행을 떠나는 딸에게 환한 웃음과 함께 손을 흔들어 주고는 하객들의 눈을 피해 형사들과 함께 차가운 구치소로 돌아갔다.

서울 강남의 70평 아파트에 살며 연간 소득세로 4천여만원을 냈던 중소기업 사장의 인생은 국제통화기금(IMF) 태풍에 어이없이 무너졌다.

미국에서 미술을 전공하던 두 자녀는 학업을 포기하고 귀국해 친구집을 전전하고 있다. 평생 궂은 일이라고는 해 본 적이 없는 아내는 하루벌이 파출부로 일하고 있다. 5개월여만에 최근 출소한 그는 일감을 찾아 전국을 헤매고 있다. 이따금 서울역 한구석에서 신문지 한 장을 깔고 새우잠을 청하는 꿈을 꾸다가 깜짝 놀라 벌떡 일어난다.

중산층이 몰락하고 있다. 고도성장의 열매를 즐기는 한국 사회의 두꺼운 허리층을 형성하던 중소기업인 자영업자 화이트칼라가 ‘모래 위의 성’처럼 힘없이 무너지고 있다.

중산층이 붕괴하면서 사회의 상층부를 구성하는 ‘20’은 그들만의 ‘성곽’을 더욱 높이 쌓아가고 있고 나머지 ‘80’은 빈민층으로 전락하는 사회의 양극화 현상이 심화하고 있다고 사회학자들은 분석한다.

통계청이 9월 발표한 ‘도시근로자 3천6백가구 소득조사’에 따르면 소득별로 다섯 계층으로 나누었을 때 하위 80%의 소득이 지난해 상반기에 비해 5.5∼14.9% 줄었다. 상위 20%의 소득은 오히려 2.3% 늘어난 것으로 나타났다.

금융자산을 많이 보유한 상위계층은 고금리의 영향으로 금융소득이 크게 늘어났다. 그러나 세금은 거꾸로 간다. 금년 1∼3월 상위 Ⅰ계층(20%)의 세금납부액 증가율은 3.6%에 그쳤지만 Ⅱ∼Ⅴ계층은 11.7∼17.6%가 늘었다. 4∼6월에는 Ⅱ∼Ⅴ계층의 세금납부액이 17.2∼25.3% 증가했으나 Ⅰ계층은 오히려 1.8% 줄었다.

서울시에 따르면 9월말 현재 서울의 노숙자 수는 모두 2천5백50명. 연말까지 3천3백여명으로 늘어날 전망이다. 가장의 실직이나 가정경제 파탄으로 점심을 굶는 학생 수도 8월말 현재 초등학생 6만9천88명, 중고교생 4만3천7백60명 등 11만2천8백48명에 이른다. 불과 한달새 1만4천여명이 늘어난 숫자다.

올해 입사 14년차인 대기업 차장 김모씨(42). 작년 그의 연봉은 3천3백39만원이었다. 올해는 보너스와 수당이 한푼도 나오지 않고 월급마저 동결됐다. 올해 연봉은 1천9백37만원. 작년보다 42%가 깎였다. 여기에 물가상승률을 감안하면 실질임금은 50% 이상 삭감된 셈이다. 떨려나간 동료들을 생각하면 이나마 다행이라고 스스로 위로해보지만 언제까지 버틸 수 있을지 갑갑하기만 하다.

한국과 함께 IMF태풍에 휘말린 동남아 국가들의 사회상을 보면 중산층 붕괴가 어떤 폭발력을 갖고 있는지를 잘 보여준다.

인구의 절반인 1억명이 빈곤선으로 추락한 인도네시아에서는 수하르토가 하야한 5월시위 이후에도 약탈과 시위가 끊이지 않고 있다. 태국의 마약범죄는 통제불능 상태에 이르렀다.

경제지표로만 볼 때는 외환위기를 벗어난 멕시코 역시 중산층의 붕괴와 사회의 양극화로 정치적 위기를 맞고 있다.

멕시코는 94년 IMF 구제금융을 받고 IMF의 권고대로 구조조정과 긴축정책을 실시한 결과 무려 1만5천개의 기업이 파산했다. 이 때문에 3백만명이 거리로 내몰렸고 국민의 구매력은 3분의 1 이상 감소했다.

아직 이 정도는 아니지만 한국에도 위험신호가 하나 둘 나타나고 있다. 살인 강도 등 강력범죄율이 30% 이상 치솟았다. 통계청과 서울가정법원 통계에 따르면 올들어 이혼율이 크게 증가하고 있다. 40,50대 부부의 ‘생활고 이혼’이 특히 눈에 띈다. 보험금을 타내기 위해 자식의 손가락마저 절단하는 비정의 아버지가 나오기도 했다.

삼성경제연구소 유상영(柳相榮)박사는 “경제성장과 민주화를 이끌어온 중산층이 몰락하고 있다”며 “사회의 통합력을 잃지 않으려면 하루 속히 중산층의 붕괴와 ‘빈익빈 부익부’현상의 심화를 막아야 한다”고 지적한다.

한국개발연구원(KDI) 황성현(黃晟鉉)박사는 “경기가 풀리면 새롭게 일자리가 창출될 부분에 전직(前職)실업자들이 취업할 수 있도록 재교육이 필요하다”면서 “소득역진(逆進)적인 조세정책도 과감히 개편돼야 한다”고 말했다.

〈이병기·이 훈기자〉watchdo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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