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F1년/실업대란]다섯집에 한집꼴 수입원 끊겨

  • 입력 1998년 11월 5일 19시 34분


올해초 증권회사에서 명예퇴직한 이영식(李榮植·45)씨는 88년 주가가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오르던 시절 서울 강남의 대형 아파트에 살면서 여유돈 3억∼4억원을 굴렸다. 술자리에서 친구들이 부러움반 시샘반으로 ‘준재벌’이라고 부르는 것이 싫지 않았다.

그로부터 10년 뒤. 이씨는 서울지방노동청에서 실업급여 수급자격증을 발급받는 신세로 바뀌었다. 8월10일 첫 실업급여 45만원을 받은 뒤 2주에 한번씩 돈을 받다가 이달 2일 마지막 실업급여를 탔다. 신문 구인광고를 매일 샅샅이 뒤지지만 갈만한 일자리가 눈에 띄지 않는다.

노동부 집계에 따르면 10월중 하루 평균 실업급여 신청자수는 1천5백88명. 작년 같은기간의 무려 9배.

9월말 현재 실업자수는 1백 57만명(실업률 7.3%)으로 97년 11월 57만명(실업률 2.6%)에 비해 1백만명이 늘었다.

실업자 집계에서 빠진 취업포기자 잠재실업자 등을 합치면 실제 실업자는 2백30만∼3백만명에 이를 것이라고 전문가들은 추산한다. 네다섯집에 한집꼴로 수입원이 끊기는 실업대란이 현실로 닥쳐온 것이다.

내년초 학교를 졸업할 34만명 가운데 3분의2 이상이 실직자로 사회에 첫발을 내딛게 될 것이라는 전망이 더욱 안타깝다.

통계청 조사에 따르면 실업자 1백57만명 가운데 1백37만명이 국제통화기금(IMF)관리체제 진입 이후 실직했다.

감원태풍 속에서 ‘살아남은’ 직장인들도 계속 실직공포에 시달리고 있다. S사 정영균과장은 “지금 회사에서 밀려나면 다시는 중산층으로 재진입하는 것이 불가능할지 모른다는 두려움을 느낀다”고 말했다.

하루 벌어 하루 먹고 살던 계층은 갑자기 일자리를 잃고 생계 유지가 막막해졌다. 한국노동연구원에 따르면 실직자 중 62%가 일용직 임시직이다.

한국노동연구원 선한승(宣翰承)박사는 “선진국들이 완만한 과정을 통해 고실업사회로 들어선데 비해 한국은 사회안전망을 제대로 갖추지 못한 채 갑작스레 ‘준비안된 사태’를 맞아 문제가 아주 심각하다”고 말한다.

정부는 과감한 구조조정으로 기업의 경쟁력을 높인 뒤 일자리를 추가 창출하는 영미식 실업대책을 선호하고 있다. 사회보장 위주로 실업문제에 대처해온 유럽은 독일(80년 3.2%→96년 10.3%) 프랑스(6.2%→12.4%)처럼 만성적 고실업에 고통받고 있다. 반면 미국은 82년 10.8%에서 97년 4.6%로 실업률이 떨어졌다.

연초에 정부가 전망한 올해 평균 실업자는 85만명. 3월 실업종합대책비로 5조원을 책정한 정부는 사태가 예상보다 훨씬 심각해지자 재원을 10조원으로 늘렸다.

그러나 실업자들은 “10조원이 다 어디로 갔느냐”고 아우성이다. 실업대책 재원으로 푼 돈이 실업자에게 흘러들어가지 않고 은행 창구에서 막혀 있다.

경기 남양주시 공장에 다니다 실직한 김영대씨(41)는 조그만 가게라도 해보려고 은행을 찾았다. 정부가 대대적으로 홍보한 실직자 대부 1천2백만원을 받기 위해 근로복지공단이 발부한 실직자 확인서를 손에 쥐고….

그러나 은행측 대답은 “대출불가”였다. 경기 가평군에 있는 친척 집을 담보로 제공하겠다고 해도 은행직원은 “시골에 있는 연립주택은 담보가치가 떨어진다”며 고개를 저었다. 김씨의 하소연에 은행직원은 “부실대출 책임을 감당하기 힘들다”며 딱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기자는 취재과정에서 실직자와 직장인들로부터 “경제가 회복되면 다시 예전처럼 안정된 직장생활이 가능해질까요”라는 질문을 수없이 받았다.

전문가들은 거의 한결같이 “한국 사회가 저성장 고실업시대로 접어들었다”는 암울한 전망을 내놓는다.

한국노동연구원 최강식(崔康植)동향분석실장은 “경제가 회복추세로 반전하면 내년 상반기에 실업률이 8.8%(실업자 1백86만명)로 최고조에 달했다가 차차 떨어질 것으로 예측되지만 장기실업자 비중은 더욱 늘어날 것”이라고 내다봤다.

숙명여대 김장호(金章鎬·경제학)교수도 “경제가 회복돼도 IMF체제 이전과 같은 3% 이하의 저실업 및 종신고용 사회로의 복귀는 불가능하다”며 “기업문화의 변화로 5%대의 실업률이 자연스러운 현상으로 자리잡을 것”이라고 전망했다.

강봉균(康奉均)청와대경제수석은 “실업문제는 경기회복과 고용증가의 시차 때문에 99년경부터 개선되기 시작할 것으로 본다”면서 “제조업보다는 서비스분야에서 고용창출이 활성화될 것”이라고 예측했다.

고용 양상도 직종별로 급격히 변할 전망이다. 삼성경제연구소 이우광(李佑光)수석연구원은 “종신고용 정규직 노동시대가 끝나고 노동시장의 진입과 퇴출이 수시로 이뤄지는 유동성 높은 고용형태로 갈 것”이라고 전망한다.

최악의 시나리오대로 구조조정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으면 8∼12%대의 고실업이 장기간 지속될 수도 있다.

일부 경제전문가는 3, 4년 뒤에 IMF 터널에서 벗어나고 성장의 엔진이 다시 달궈지더라도 ‘일자리 없는 성장’이 될 것이라는 우울한 전망을 내놓는다.

전문가들은 이제 한국도 선진국과 같은 5∼7% 실업이 보편화할 것이라는 인식을 전제로 사회안전망을 대폭 확충해야 한다는 의견을 제시한다.

〈이기홍·이명재기자〉sechepa@donga.com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