볼턴 “내가 민간인으로 돌아가서 北 지도자들은 기쁠 것”[이정은 기자의 우아한]

  • 동아일보
  • 입력 2019년 10월 1일 14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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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일(현지 시간) 워싱턴 싱크탱크 전략국제문제연구소(CSIS) 2층 행사장. 연단에 오른 존 볼턴 백악관 전 국가안보보좌관이 “내가 민간인으로 돌아가서 북한 지도자들은 기쁠 것”이라는 농담으로 강연을 시작하자 청중들 사이에서 웃음이 터졌습니다. 그러나 그가 곧이어 “내가 북한의 핵 프로그램이 전 세계에 던지는 위협에 대해 제약 없이(unvarnished) 이야기할 수 있다는 점에서는 안 기쁠 것”이라고 하자 곧바로 긴장감이 감도는 분위기로 확 바뀌었습니다.

이번 강연은 볼턴 전 보좌관이 지난달 초 트럼프 대통령이 트위터를 통해 전격 경질 소식을 알린 이후 첫 공개석상에 나선 자리라는 점에서 주목받았죠. 그는 트럼프 대통령이라는 이름은 아예 입에 올리지도 않았고, 직접적인 비판은 자제했습니다. 트럼프 대통령의 대북정책에 대한 의견을 묻는 빅터 차 CSIS 한국석좌의 질문에 “좋은 시도(였지만 안 먹힌다)!”라고 받아치며 즉답을 피해가더군요.

그러나 40분간의 강연과 질의응답은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의 유화적 대북 정책에 대한 날 선 비판으로 채워졌습니다. 트럼프 대통령을 거론하지 않고도 조목조목 문제점을 지적하는 그의 강연은 잔뜩 날이 서 있다는 느낌이었습니다. 그는 “북한은 핵무기 포기라는 전략적 결정을 한 적이 없고, 그 반대가 맞다”며 “김정은은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통해서 핵무기를 유지할 뿐 아니라 계속 개발 및 강화할 것”이라고 일갈했습니다.

북한이 더 이상 핵실험을 하지 않는 이유에 대해서는 “북한이 자체적으로 실험이 끝났고, 핵탄두와 ICBM 생산이 가능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습니다. 현재 미사일 시험발사를 통해 개발하고 있는 기술도 장거리 미사일에 그대로 적용될 수 있고, 이는 사정거리에 들어가는 한국 뿐 아니라 미국에도 위협이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고 강조했습니다.

북한의 미사일 시험발사에 대해서는 유엔 결의안 조항을 구체적으로 들어가면서 결의 위반이 맞다고 지적했습니다. “내가 그 결의안 작성 당시 유엔에 있었기 때문에 안다”면서요. 그는 “유엔 결의안을 맹목적으로 지켜야 한다는 게 아니라, 그런 결의안을 만드는 것에 미국이 주도적으로 노력했다는 것을 말하고자 한다”며 “그래놓고 북한의 결의 위반을 문제삼지 않으면 국제사회가 우리를 어떻게 보겠느냐”고 반문했습니다.

그는 북한의 핵 개발을 비확산의 관점에서도 문제 삼았습니다. 북한은 핵무기 기술과 무기를 이란 같은 나라에 판매할 수 있고, 이는 북한의 핵보유가 주변국들에 위험이 되는 수준을 뛰어넘는 문제라는 지적입니다. 이를 막는 데 미국이 실패한다면 그 어떤 다른 국가나 국제기구도 대처할 수 없게 된다고 그는 우려했습니다. 또 “핵무기 개발의 과학적, 기술적 어려움을 극복하는 데에는 시간이 필요하다”며 “(이를 막으려는) 비확산론자들에게 시간은 불리한 것”이라고 덧붙였습니다. 논란이 되는 부분이라고 전제하면서도 “필요시 북에 대해 군사적 옵션을 써야 한다”고 주장했고, 북한의 현재 리더가 핵을 절대로 포기하지 않을 것이라는 위의 전제를 바탕으로 정권교체 필요성도 언급했습니다.

그는 이날 강연에서 윈스턴 처칠 전 영국총리의 1935년 연설 한 구절을 인용하기도 했습니다. 독일의 침략과 관련해 “상황 관리가 가능할 때 무시하고 있다가 통제 불능 상태가 됐을 때에야 행동에 나서는 것, 긴급해질 때까지 손놓고 있는 것이야말로 역사가 반복되는 이유”라고 했던 연설 말입니다. 볼턴 전 보좌관은 “이런 비관적인 내용이 북에는 적용되지 않기를 바란다”고 역설했습니다.

2월 하노이 회담 등에서 김정은을 직접 만나보니 어땠느냐는 질문에 그는 “완전히 정권을 장악했다고 믿는다. 이를 의심하지 않는다”고 답했고, 제재 관련해서는 “짧은 기간에 집중적으로 들어가야 효과가 있다”고 답했습니다. 점증적, 장기적으로 제재를 가하게 되면 대상국은 생존하고 완화하는 방법을 배우게 된다는 것이죠. 현재 이뤄지고 있는 선박 간 불법환적 같은 게 대표적이라는 설명입니다.

‘리비아 모델이 북한에도 적용 가능하냐’는 질문도 나왔죠. 이에 대한 대답은 “북한에 좀 더 대안이 될 만한 것을 제공할 수 있다면 가능하다고 본다”는 것. 그는 그러면서 과거 리비아의 핵물질과 탄도미사일 부품들을 반출해 옮겨놨던 테네시주의 오크리지를 언급, “오크리지에는 북한의 모든 핵무기를 담을 충분한 공간이 있다”고 너스레를 떨기도 했습니다.

그의 발언 중에 경천동지할 만한 새로운 내용이나 백악관 내부 정책결정 과정의 폭로 같은 건 없었습니다. 북한에 대한 그의 시각은 이미 많이 알려진 것이기도 했고요. 다만 이날 저와 같은 테이블에서 볼턴 전 보좌관의 강연을 듣고 있는 워싱턴의 인사 몇 명은 “쭉 들어보니 나름대로의 논리가 분명하다”며 고개를 끄덕이더군요. ‘대북 초강경파’, ‘네오콘의 대부’ 등으로 평가받아온 그의 북한 관련 발언들을 그렇게 시작부터 끝까지 들어본 것은 처음이라면서 말입니다. 실제로 그의 북한 관련 언급은 대체로 방송 인터뷰에서 한 두 개 질문에 대한 짧은 답변으로 끝나거나, 신문기사에 한두 줄 인용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죠. 현안의 포인트별로 펼쳐낸 그의 연설은 매끄러운 전개와 분명한 논지가 인상적이었습니다. 저런 논리 구조를 바탕으로 북한을 다뤄온 볼턴 전 보좌관이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을 ‘사랑에 빠진 친구’로 부르는 트럼프 대통령의 유화적 대북 정책에 호응하기가 참 어려웠겠다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이제 백악관의 국가안보보장회의(NSC)에 그는 없습니다. 워싱턴에서는 알려지지 않았던 낯선 인물, 로버트 오브라이언 신임 보좌관이 그 자리에 앉아있죠. 국가안보보좌관의 교체가 앞으로 미국의 대북정책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는 예단하기 어렵습니다. 어차피 볼턴 전 보좌관이 대북정책에서 밀려난 지는 오래였고, 트럼프 대통령이 정책 주도권을 쥐고 있는 만큼 큰 변화는 없을 것이라는 전망이 대세이기는 하지만, 탄핵 정국에 직면한 대통령이 북한이라는 카드를 어떻게 쓸 지는 지켜봐야 할 상황입니다.

볼턴 전 보좌관은 앞으로 자신의 백악관 경험을 담은 자서전을 쓸 예정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미국의 주요 출판사들이 그에게 눈독을 들이고 그의 책을 출판하기 위해 집중적으로 구애작전을 펴고 있다는 소문도 돕니다. 그가 진짜로 하고 싶은 이야기, 꺼내고 싶은 ‘특종감’ 발언들은 그의 책을 위해 이번 강연에서는 아껴놨다는 말도 나옵니다. 벌써부터 내용이 궁금해집니다.

이정은 워싱턴 특파원(북한학 석사) lightee@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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