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아한 청년 발언대]북한이탈주민의 정체성은 오직 북한이탈주민?

  • 동아일보
  • 입력 2018년 12월 7일 14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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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나는 북한이탈주민이다.

2. 질문 들어간다. 나는 남자일까? 여자일까? 내 운명을 바꾸어 버리고 멀리 도망쳐간 청소년시절의 사건은 무엇일까? 나는 철학을 좋아할까? 음악을 좋아할까? 나는 동성애자일까? 이성애자일까? 혹은 바이섹슈얼일까? 나는 육식을 즐길까? 채식주의자일까? 여기에 답을 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역시나 전지전능한 신도 난제일 것이다.

3. 우리는 “사과란 무엇인가?” “의자란 무엇인가?”에 대한 답을 할 수 있다. 그것은 과일인 사과의 특징, 가구인 의자의 특징들을 가진 것이 무엇인지만 알면 답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북한이탈주민이란 누구인가?”라는 답에는 답을 하기 어렵다. 3만 여명의 북한이탈주민이 공통을 갖고 있는 특징이란 기껏해야 한반도 이북에서 태어났고 남한으로 이주한 사람들이라는 것 외에 없기 때문이다. 아무리 그 단어를 뜯어보아도 그 안에는 그 집단의 어떤 개인이 겪은 인생사와 삶의 태도, 업적, 취미 따위를 알아낼 수 없다.

4. 나는 북한이탈주민이지만 오직 북한이탈주민만은 아니다. 나의 정체성은 하나의 이름, 명명됨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5. 우리는 피부관리를 하는 남자이고 서울에서는 거의 잠을 자지 않는 서울시민이면서 예수의 오병이어 기적이 물리학적으로 어떻게 가능한지 회의적인 크리스천이면서 학문과 사회운동에서 두각을 나타낸 버트란트 러셀을 존경하고 공간지각이 남자에 비해 떨어진다는 이유로 만든 여성주차장이 성차별이라고 생각하는 페미니스트이면서 살인과 육식은 다를 게 없다고 믿으면서도 고기를 멀리하지 못하는 의지박약자이면서 몇몇 사람들이 미워하는 네트워크마케팅 사업가이고 운동중독자이고 비혼주의자인 탈북자를 상상할 수 있다.

6. 어떤 사람들은 그들이 수많은 정체성을 가진 개체들임을 종종 잊고 산다. 얼마 전 지인에게 들은 이야기가 있다. 한 택시기사가 과속을 하다가 횡단보도를 건너던 초등학생을 다치게 했다. 그 아이의 어머니는 북한이탈주민이이면서 40대 여성이고 회계회사 사무원이고 고향은 함경도였으며 그날 커피를 과다 섭취했으며 전날 남자친구와 싸웠으며 경기도 화성에 거주하고 과거에 남자 여럿이 그의 뒤를 따라다니느라 교통체증을 일으키게 했더라는 전설의 미녀였지만 온 몸의 혈액에 알코올 풀고 당차게 사랑을 고백했던 가슴 넓은 사나이에게 뿅가서 결혼했지만 알콜성 인격의 폭행에 상처받고 이혼한 호모 사피엔스였다. 이 어머니는 그 기사에게 전화로 갖은 욕을 호우처럼 퍼붓고 만나서도 서슬 퍼런 도끼눈으로 화를 냈다. 기사가 보상금으로 몇 백 내놓겠다고 했으나 그녀는 몇 천을 내 놓으라고 요구했다. 택시기사는 예전에 “이제 만나러 갑니다”나 “모란봉클럽”같은 프로그램을 열혈시청하면서 북한이탈주민에 대한 동정심과 남남북녀의 사랑을 꿈꿨지만, 만나고 보니 상종 못 할 사람들이라고 말했다고 한다. 그녀는 수많은 정체성을 가진 사람인데, 왜 그 기사는 오직 하나의, 북한이탈주민이라는 정체성과 그녀의 “과다청구행위”와 연결시킬까? 어머니라면? 혹은 과거 남자에게 받았던 상처 때문이라면? 커피 과다섭취로 인한 각성상태는?

7. 이 에피소드는 스탠퍼드대학교의 로젠한 교수가 쓴 “정신병원에서 제정신으로 지내기”를 연상시킨다. 로젠한은 정상인 8명과 어느 정신병원에 입원하게 된다. 그들은 그 곳에서 정상적인 생활을 했지만 “과대망상적 정신분열 증상”이라고 진단내린 의사들은 그들의 모든 행동을 이 증상에 맞추어 해석한다. 오히려 몇몇 환자들이 그들이 가짜 환자임을 알았다.

8. 우리가 어떤 하나의 정체성, 단 하나의 해석 틀로만 사람들을 바라볼 때 편견을 가질 수 밖에 없다는 것이 두 이야기의 의미이다. 북한이탈주민을 북한이탈주민으로만 바라보지 않는 것, 살아온 삶의 역사를 듣는 것, 세상을 어떻게 바라보는지, 어떤 행동 패턴을 갖고 있는지 이야기 나누고 오래도록 함께 지내야 겨우 알 수 있다. 그렇게 지내다보면 우리는 알 수 있다. 우리가 알던 거대한 범주 개념인 북한이탈주민이라는 틀은 사라지고 극히 개인적인 특징들만 남는다는 것을. 결국 우리는 그가 가진 성명만 듣고도, 그의 목소리만 듣고도 그가 사는 개인적인 세계 어디라도 익숙한 풍경으로 다가온다는 것을.

최장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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