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北-日 납치 재조사 합의’, 결과 상관없이 중요한 의미 갖는 이유는…

  • 동아일보
  • 입력 2014년 5월 31일 20시 46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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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은 일본인 납치 문제를 재조사하고, 일본은 북한에 대한 일본의 독자적 제재를 풀기로 합의한 것은 최근의 동북아 정세와 관련해 주목할 만한 '사건'이다. 일부에서는 이 합의가 제대로 이행될지에 대해 의문을 품기도 하지만, 이 합의는 결과와 상관없이 그 자체로서 의미를 갖는다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첫째, 일본도 북한도 국제사회의 '독립변수'로서 정책적 선택을 하겠다는 의지를 표시했다는 점이다. 일본이 북한과 합의를 하면서 미국 정부와 긴밀하게 조율한 흔적은 보이지 않는다. 한국과도 마찬가지다. 젠 사키 미 국무부 대변인이 이 문제에 대한 질문을 받고 "일본 정부에게 물어보라"고 한 것은 불쾌감의 표현이다. 북일 양국이 발표하기 전에 통보를 받았다고는 하지만 자세한 내용은 몰랐을 가능성이 높다. 한국 정부로서도 남북관계가 원만하게 진전되지 않는 시점에서 일본이 북한과 손을 잡는 것은 한국의 대북 영향력 저하로 이어질 것이다.

북한은 어떤가. 시진핑 주석 취임 이후 중국은 북한에 대해 예전보다는 호의적이지 않은 게 사실이다. 더욱이 김정은이 실권을 잡은 이후에 중국 방문을 못하고 있는 마당에, 시진핑 주석이 6월 경 한국을 방문하는 데 대해 불만이 있다. 그렇더라도 북한에 대한 중국의 영향력은 여전하다. 이런 시점에서 북한이 일본과 화해를 시도하는 것은 중국에 대한 항의의 표시이자, 우리도 '다른 카드'가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두 번째는 일본도 북한도 국내 정치의 필요성에 따라 얼마든지 대담한 선택을 할 수 있다는 점을 시사한 것이다. 아베 총리는 두 번째 집권을 하면서 일본인 납북문제를 제1의 국정과제로 삼겠다고 공언했다. 한국에는 잘 알려져 있지 않지만 일본인 납치 문제는 전 국민의 관심사이자, 정권의 명운에도 영향을 미칠만한 주요한 사안이다. 그 점에서 이번 합의는 아베 총리에게 날개를 달아줬다고 볼 수 있다. 아베 총리의 스타일을 볼 때 적어도 이 문제와 관련해 주변 국가를 의식하지 않는 선택은 계속될 것이다.

북한도 그렇다. 북한은 현재 한국은 물론이고, 미국 중국과의 관계개선도 힘든 실정이다. 그 돌파구를 일본에서 찾고자 한 것은 일부 예상은 했지만 대담한 선택이라고 할 수 있다. 더욱이 일본과 관계개선이 이뤄진다면 북한은 경제적으로 숨통이 트인다. 일본은 2006년 10월 북한의 핵실험과 2010년 천안함 폭침 이후 유엔안보리의 제재와는 별도로 북한에 대해 여러 제재를 가하고 있다. 수입과 수출을 전면 금지하고 있는 게 대표적이고, 10만 엔 이상의 현금과 300만 엔 이상 송금 시 보고를 의무화하고 있다. 또한 북한 국적의 선박과 전세항공기의 입국도 금지하고 있다. 무역이 재개되고, 조총련의 송금 규제가 완화된다면 빈사 직전의 북한에게는 큰 선물이 될 것이다.

북일 접근은 의도했든 의도하지 않았든 동북아 정세에도 미묘한 파장을 낳고 있다. 우선 일본의 입장에서 보면 박근혜 대통령 취임 이후 역사를 매개로 빠르게 진전되고 있는 한중 밀월 무드에 '옐로 카드'를 보였다고 볼 수 있다. 이 역시 한국에서는 잘 알려져 있지 않지만 최근 일본의 반한 무드의 원인 중 하나로 꼭 언급되고 있는 것이 한국의 중국 시프트다. 한국이 중국과 친해지면서 일본을 무시하고 있는 게 아니냐는, 일종의 섭섭함과 경계심이 일본 정부와 일반 국민들 사이에 폭넓게 퍼져 있다.

북일 접근은 당연히 대북 제재라는 공동보조에 지장을 초래할 수 있다. 아마도 한국과 미국이 가장 우려하는 것도 이 대목일 것이다. 즉 한미일 공조가 깨지지는 않더라도 대북제재의 효과를 떨어뜨림으로써 북한의 기를 살려줄 수 있다. 일본은 대북 제재를 논의하는 6자회담에서도 일본인 납치 문제를 의제에 넣기를 일관되게 희망해 왔다. 앞서 언급했듯 이 문제가 일본 국내에서는 대단히 중요한 사안이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납치문제를 6자회담의 테이블에 올리려는 일본의 시도는 그동안 그리 성공적이지 못했다. 그런데 북한과 일본이 별도로 국장급 회담을 열어 이 문제에 합의한 것은 6자회담에 대한 일본의 의존도를 줄이게 될 것이다. 또한 납치문제의 진전을 바라는 일본으로서는 대북제재 국면에서 북한의 입장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북한도 이번 합의로 한미일 공조를 흐트러뜨리는 효과를 내심 기대하고 있을 게 분명하다. 물론 한미일 어느 나라도 핵문제 해결을 위한 대북제재와 일본인 납치 문제는 별개의 사안이라고 말하겠지만, 외교라는 것이 칼로 무 자르듯 명쾌하게 분리할 수는 없을 것이다.

미국과 한국은 앞으로 어떻게 나올 것인가. 미국은 납치 문제 해결을 위한 일본의 노력을 '인도적 문제' 또는 '인권의 문제'라는 점에서 대놓고 반대하지는 못할 것이다. 그렇다고 손놓고 있지도 않을 것이다. 아마도 진전 상황에 대한 상세한 정보를 요구할 것이고, 그것이 대북제재의 효과를 반감시키는 방향으로 진전되는 것은 반대할 것이다. 하지만 미국의 이런 시도는 그리 큰 효과는 발휘하지 못할 것 같다. 최근 동북아 정세 속에서 일본의 도움이 절실해진 미국으로서는 일본의 최대 국내 현안인 이 문제의 진전을 막을 명분이 없다. 또한 아베 총리도 이 문제만큼은 양보하지 않을 가능성이 크다.

한국은 더욱 곤혹스럽게 됐다. 한일 관계가 어느 때보다도 냉각되어 있는 시점에서 일본에게 협조를 요청하기도 만만찮다. 더욱이 세월호 참사로 인해 정권의 장악력이 떨어진 마당에 한일 관계를 개선하고, 이를 바탕으로 일본에게 대북억지력을 유지해달라고 요구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는 관료들이 있기나 한 건지 모르겠다. 이는 한국만의 문제가 아니다. 일본의 분위기도 한일 관계 개선이 어렵다면 어려운 대로 그냥 가면 되지 않겠느냐는 분위기가 점차 강해지고 있다. 우리가 의식하지 않는 사이, 한일간의 거리는 꽤나 멀어져 버렸다.

북일 합의 이후의 북한과 일본은 어떻게 될 것인가. 북한도 일본도 움직일 공간이 많다. 북한의 입장에서 보면 납치문제 재조사는, 없는 것을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니라 있는 것을 재포장해서 내놓는 일이다. 일본이 이 문제에 거국적인 관심을 갖고 있기 때문에 일본을 만족시켜 줄 수 있는 카드도 꽤 많을 것이다. 일본 정부가 납북됐다고 인정한 12명(17명 중 5명은 2002년 귀국) 외에 납북가능성은 있으나 정부가 인정은 하지 않은 소위 '특정 실종자' 중에 몇 명이라도 북한에 생존해 있는 사실을 인정한다면 이는 일본을 흔드는 최대의 뉴스가 될 것이다. 김정은의 입장에서는 위험부담이 있긴 하지만 "미안하다, 그러나 내가 한일이 아니다"라며 빠져 나갈 수는 있다. 어떤 경우든 북한은 효과를 극대화하기 위해 조사의 내용과 발표 시기 등은 면밀하게 계산해서 연출할 것으로 보인다.

일본도 그리 나쁘지 않다. 북일 합의 자체가 아베 정권에게는 이미 큰 소득이다. 당분간은 북한의 심기를 건드리지 않기 위해 노력하겠지만, 북한이 제대로 협조를 하지 않아 최악의 경우 합의가 무산된다고 해도 빠져나갈 구멍이 있다. 즉, 일본 정부는 최선을 다했으나 북한이 합의를 어기고 성의를 보여주지 않았다고 비난하면 된다. 북한의 비정상적인 행태를 일본 국민들은 너무나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베 총리는 최상의 시나리오를 머릿속에 그리고 있을지 모르겠다. 2002년 고이즈미 준이치로 총리가 그러했듯, 평양을 방문해 납치 피해자를 자신의 전용기에 태우고 귀국하는 시나리오다. 그 중에 납치 피해자의 상징이 된 요코다 메구미 씨의 딸이 들어있다면 금상첨화일 것이다. 만약 그런 일이 정말로 실현된다면 아베 총리의 앞길은 탄탄대로일 것이다. 다만, 북일 국교정상화는 상당기간 실현이 어려울 것이라는 게 전문가들의 대체적인 관측이다. 국교 정상화는 일제강점기의 피해 보상 등 더 높고, 더 광범위한 합의가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심규선 대기자 ksshim@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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