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료실 등 의료기관서 폭력에 노출된 의료진들…처벌만으로 막을 수 없다

  • 동아일보
  • 입력 2019년 9월 26일 18시 39분


코멘트

안전한 의료 현장을 위하여

2018년 세밑 강북삼성병원 정신건강의학과 임세원 교수가 외래진료 도중 불의의 참사를 당했다. 생명이 위협받는 상황에서도 임 교수는 다른 의료인들의 안전을 위해 헌신했다. 의료 현장은 생명을 살리는 곳이지 위협받는 곳이어서는 안 된다. 그간 진료실, 응급실, 병실 등 의료기관 도처에서 의료인에 대한 폭력이 자행돼 왔다. 이는 비단 한국의 문제만이 아니라 세계 곳곳의 의료 현장에서 벌어지고 있다.

종종 의료인은 질병과 씨름하는 극한 상황의 한복판에서 기대와 감사, 실망과 원망의 대상이 됐다. 폭언, 폭행, 협박 등 폭력을 당한 의료인은 신체적 고통은 물론이고 심리적 고통, 특히 불안과 두려움, 트라우마 반응까지 겪을 수 있다. 폭력은 의료인 개인의 신체와 정신의 건강을 파괴하고 인권과 존엄성을 위협한다. 치료 환경과 환자 치료에도 부정적인 영향을 끼친다. 안전이 위협받는 불안한 상황에서 최선의 진료는 불가능하다.

구미 선진국은 의료인에 대한 폭력을 예방하기 위한 정책을 적극적으로 홍보하고 있다. 처벌 규정을 강화하고 교육 프로그램을 보급해 왔다. 미국은 대부분의 주에서 의료인 대상 폭력에 가중처벌을 적용한다. 영국은 의료인 대상 폭력을 국민 건강을 위협하는 행위로 간주하고 절대로 용납하지 않겠다는 철저한 무관용 대응 정책을 시행하고 있다. 영국 보건당국은 1999년 무관용 대응을 천명한 후에 오히려 의료인 폭력 피해 신고 건수가 늘어나자 정책이 성공했다며 환영했다. 이전에는 폭력을 당해도 신고조차 하지 않고 체념하고 묻어두었던 의료인들이 적극적으로 신고하기 시작했고 이를 통해 의료인의 안전이 보장받을 수 있게 됐다.

의료 현장의 폭력을 처벌만으로 막을 수는 없다. 우선 폭력을 행하는 환자와 보호자의 심정을 살펴봐야 한다. 의료 서비스에 대한 불만을 해소하기 위해서는 의료 서비스 전반을 개선해야 한다. 의사와 환자 간 의사소통과 이해의 폭을 넓힐 수 있는 노력이 필요하다. 고통에 빠진 절박한 순간에 불통과 몰이해는 환자와 보호자의 분노를 자극하기 때문이다. 의료인은 환자와 보호자에게 공감하는 진심 어린 태도를 익혀야 한다. 온갖 이유를 붙여서 의료인을 위협하는 장면을 자극적인 영상으로 만들어 폭력에 대한 경각심을 마비시키고 의료인에 대한 부정적인 편견을 부추기는 대중매체의 행태도 개선해야 한다.

임세원 교수가 생전에 자살예방사업 등 국민 정신건강 증진을 위해 헌신한 사실이 알려지며 그의 희생은 온 국민의 마음에 깊고 무거운 울림을 전달했다. 임 교수의 유족은 “평소 고인은 마음의 고통이 있는 모든 분이 사회적 편견이나 차별 없이 누구나 쉽게, 정신적 치료와 사회적 지원을 받기를 원했다”고 전했다. 유족의 성숙한 대처는 폭력에 대한 우리의 태도에 경종을 울렸다. 폭력을 당한 의사만이 아니라 폭력을 행한 환자의 마음까지 헤아리고 보살피는 큰 의사의 모범을 보여준 것이다.

임세원 교수와 유가족의 숭고한 유지를 받들어 보건당국은 정신질환자 치료 체계를 개선해야 한다. 정신질환자는 위험한 사람이라는 잘못된 편견을 바로잡아 누구라도 남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고 치료받을 수 있는 사회적 분위기를 조성하자. 피해망상, 환각 등 심한 급성기 증상을 가진 중증 정신질환자가 제때 치료받지 못하면 극히 일부에서 자신과 타인의 안전을 위협할 수 있다. 망상과 현실을 구분하지 못해서 자신이 병들었다는 사실을 부정하며 치료를 거부하는 중증 정신질환자의 경우에 현행 제도로는 치료를 받게 하는 것이 너무나 어렵다. 현실을 외면한 형식적 규제 탓에 가족과 의료인, 일상의 시민조차 위험에 처한다. 무엇보다 큰 고통을 겪는 것은 질병을 가진 환자 자신이다. 중증 정신질환자 치료의 책임을 더 이상 가족과 의료인에게만 떠넘겨서는 안 된다. 정부가 직접 나서서 환자의 인권을 보호하고 건강하게 살 권리를 보장해줘야 한다.

의료인의 희생은 폭력을 위한 것이 아니라 환자 치료를 위한 것이다. 폭력 없는 안전한 의료 현장에서 의료인은 환자의 건강을 지킬 수 있다. 환자와 의료인, 모든 시민의 안전, 즉 의료 현장의 안전을 지켜야 한다. 그 목적은 고통에 빠진 사람을 치료하기 위함이다. 최선의 의료 서비스를 위해서 두려움에 기인한 차갑고 소극적인 안전이 아니라 치유를 위한 따뜻하고 적극적인 안전이 필요하다.

정찬승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대한신경정신의학회 故 임세원 교수 추모사업위원회 위원)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댓글 0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