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식보다는 지력이 가치 있어… 인격적 성장 쌓을 수 있는 교육 필요

  • 동아일보
  • 입력 2019년 10월 15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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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 최진석 서강대 철학과 명예교수
‘새말 새몸짓’으로 교육과 정치 혁신해야

1959년 전남 하의도 출생. 베이징대 철학과 박사, 서강대 철학과 교수 건명원 초대원장. 현 서강대 철학과 명예교수. 저서 ‘탁월한 사유의 시선’ ‘경계에 흐르다’, ‘노자의 목소리로 듣는 도덕경’, ‘인간이 그리는 무늬’ 등. 최혁중 기자 sajinman@donga.com
1959년 전남 하의도 출생. 베이징대 철학과 박사, 서강대 철학과 교수 건명원 초대원장. 현 서강대 철학과 명예교수. 저서 ‘탁월한 사유의 시선’ ‘경계에 흐르다’, ‘노자의 목소리로 듣는 도덕경’, ‘인간이 그리는 무늬’ 등. 최혁중 기자 sajinman@donga.com
창의적인 미래 인재 양성을 국가 발전의 제1 어젠다(의제)로 삼아야 한다는 주장을 활발하게 펴고 있는 최진석 서강대 철학과 명예교수(60·사진). 그는 요즘 자신을 “나만의 고유한 ‘비린내’가 사라질까 걱정하는 사람”으로 표현하곤 한다. 대학교수로 오래된 틀 안에서 갇혔던 지난날을 성찰하는 태도다.

최 교수는 “몇십 년 동안 변하지 않은 대학 교육 시스템에서 내 자신이 고갈되는 느낌을 계속 받았다”며 “학생들에게 ‘우리’가 아닌 ‘나’로 제대로 살라고 가르치면서 정작 나는 그저 시스템의 ‘관리인’으로 살았다. 물속을 휘젓는 물고기가 아닌 마치 시장 좌판에 누워 있는 생선처럼 말이다”라고 자책했다. 자신이 가르친 대로 자신도 살고 싶어 현실 참여를 결심했다는 최 교수. 그래서 2024년이 교수 정년이지만 과감하게 7년이나 앞서서 18년간 재직했던 학교를 떠났다. 최 교수를 지난달 25일 만나 한국 사회와 교육이 가야할 방향에 대해 들었다.

교수 재직 시절에 설립한 인문·과학·예술 전문학교인 건명원(建明苑)에 대한 얘기를 먼저 안 할 수 없다. 2015년부터 4년 가까이 원장을 지내면서 창의적 인재 교육의 산파 역할을 했는데.

“우리 사회가 미래를 얘기하면서 인재 교육을 너무 소홀히 하고 있는 게 아닌가하는 물음표가 있었다. 시간이 아니라 인재가 미래를 결정한다는 확고한 믿음이 있다. 종속적이 아닌 주도적인 삶을 살아야 한다. 따라가는 게 아니라 선도할 수 있는 사람이 배출돼야 한다. 창의력 있는 인재를 기르는 것이 사회가 한 단계 성숙하는데 꼭 필요한 일이라고 생각해 건명원을 설립하게 됐다. 지금 교육 체제에서는 표준화된 인재를 다수 기를 수 있어도 창의적 인재 발굴에는 한계가 있다고 봤다. 창의 전사(戰士)라고도 하는데….”

창의 전사?

“창의적 인재를 말한다. 결국 자유로운 독립적 주체다. 핵심은 자신이 ‘우리’ 가운데 한 명으로 사는 게 아니라 온전한 ‘자기’로 되어 있는 용기 있는 사람이다.”

학교를 성장시키는 과정인데 원장 자리에서 물러났다.

“4년 동안 기초를 닦아 놨는데 내가 조금 더 실천적인 사람이 되고 싶었다. 건명원에서 학생들에게 역사를 분석하고 평가하는데 머무르는 사람이 아니라 스스로 역사가 되려는 도전에 나서야 할 때라고 강조했다. 가르치기만 하고 행동을 하지 않으면 반쪽 교육밖에 안 되겠다 싶어서 나오게 됐다. 가르치고자 하는 대로 사는 것이 가장 효과적인 교육 방법이다.”

건명원에서 지향하는 창의 교육의 핵심은 무엇인가.

“인문학, 과학, 예술이 지향하는 ‘높이’에 도달해야 한다는 것이 취지다. 우리는 아직 인문학적 높이가 아닌 사회과학적 높이에서 살고 있다. 과학적 높이가 아니라 기술적 높이에 살고 있다. 또 예술적 높이가 아니라 예능적 높이에서 사는 모습이 일반적이다. 지금 말하는 인문학, 과학, 예술의 높이는 훨씬 더 추상적이거나 지적이면서 지배적인 높이다. 선도력이 구현되는 높이다.”

높이?

“시선이다. 예를 들어 과거 동양이 서양에 굴복당한 이유는 추상적인 높이, 시선에서 삶을 지배하는 장치를 갖지 못해서였다. 서양을 극복하려는 노력의 핵심은 전체적으로 삶을 어떻게 철학화, 과학화하느냐에 달렸었다. 아편전쟁 이전까지는 전 세계가 기술의 시대였다. 그런데 과학의 시대로 넘어오면서 동양이 과학적 높이에서 실행되는 생산력을 서양만큼 따라가지 못했다. 인문학적, 과학적, 예술적 높이에서 시선이 확보되지 않으면 선도력을 갖춘 전략 국가로 올라설 수 없다. 우리는 바로 (전략 국가) 밑에 있는 국가다. 한국은 기술적 높이에서 뭔가를 따라하는 건 세계 최고 수준이다. 여기서 전략 국가 높이로 올라서느냐, 아니냐가 국가와 민족의 운명을 결정할 것이다. 이것이 현재 국가 최고의 어젠다가 돼야 한다. 적폐 청산 등에 역량을 소모할 때가 아니다. ‘높이’를 이해하면서 4차 산업으로 명명되는 문명의 도도한 변화 흐름에 올라타는 게 중요하다.”

민주화라는 어젠다에서 머무르고 있다는 얘기인가.

“해방 이후 정부수립(건국)-산업화-민주화라는 적절한 어젠다를 시대에 따라 설정하고 그것들을 완수하면서 양적, 질적 기적을 이뤘던 한국이다. 불행하게도 언제부턴가 국가적 높이에서 구현하려는 어젠다가 사라졌다. 진영만 남았다. 민주화 시대의 문제 의식이나 사고 방식은 새로운 어젠다에 의해 도태되어야 한다. 그것이 역사 발전이다. 결국 창의성 있는 독립적 인재들을 통한 선진화가 다음 어젠다가 돼야 한다고 본다. 선진화는 일등이 아니라 일류를 꿈꾸는 사회의 모습이다.”


8월 발기인 자격으로 사단법인 ‘새말 새몸짓’을 출범시켰다.

“나는 우리 정치와 교육이 극심한 한계에 이르렀다고 본다. 상상력이나 본질적 가치를 추구하려는 태도는 사라졌고, 모두 기능에 빠졌다. ‘수능 성적을 몇 %로 정할 것인지’, ‘자사고를 없애냐 마냐’하는 문제가 죽은 교육을 정말 살릴 수 있다고 믿는가. 교육의 영역에서 상상력이나 모험심은 완전히 바닥났다. 나라 전체가 ‘헌 말, 헌 몸짓’에 갇혀서 하던 시늉만 하고 있다. 말이라는 것은 세계와 관계하는 방식이다, 문법, 이론, 세계관 등이다. 몸짓은 태도다. 관계하는 방식만 가져서는 안 되고 삶에서 보여주는 태도까지 갖추어야 한다. 시선을 인문, 과학, 예술적 높이로 한 단계 올리려면 새로운 말과 몸짓으로 무장해야 한다는 것이다. 삶을 대하는 총체적인 방식과 태도가 전면적으로 새로워지지 않고는 국가적 비효율이 쌓이는 것을 피할 길이 없을 것이다.”

교육의 순기능보다는 역기능이 드러나는 경우도 있다.

“여러 다양한 입시 제도가 있지만 취지대로 수행이 안 된다. 운영하는 사람들이나 학생들의 인격적인 준비가 돼 있지 않기 때문이다. 사실은 도덕이 무너졌다. 민주화 단계까진 나름 효율적이었던 현재 교육 시스템으로는 도덕적 자각 능력을 갖춘 창의 인재 양성을 기대할 수 없다. 독립적 주체를 기르는 일인데 결국 대답보다는 질문을 잘하는 인재다. 대답은 기능이고, 질문은 인격이다. 질문이 없다는 말은 인격적으로 준비가 안 됐다는 뜻이다. 새롭고 위대한 것은 대답이 아닌 질문의 결과다. 선도력의 차원에서는 결국 인격이 문제다. 자신이 과거 한 말과 지금의 태도가 달라도 괜찮다고 하는 것, 상대방을 공격할 때 판단 기준과 자기를 변호할 때 적용하는 판단 기준이 다른 이중적 태도가 너무 팽배해 있다. 현재 국가 교육 시스템 내에서 이런 병폐가 나타나고 있는데, 인격적 모범을 간과하는 시스템으로는 의미가 없다. 단순히 제도를 바꾸는 것으로 해결될 일이 아니다.”

지식을 배우고 소유하는 과정이 잘못된 것일 수도 있겠다.

“국가를 작동시키는 두 톱니바퀴는 교육과 정치다. 지금 한국 사회에서 가장 큰 문제 중 하나가 교육과 정치가 악순환의 고리로 고착돼 나타난 부패다. 부패가 문제인 이유는 사회 발전 방향과 속도에 영향을 미치기 때문인데, 이 정도의 부패 대다수는 고학력자들의 부패다. 독립적 사고력을 배운 것이 아니라 사고력의 결과, 즉 지식만 배워서다. 지식인으로 성장하는 과정에서 공적, 윤리적 태도를 익히지 못했다는 얘기다.”

단순히 지식을 양적으로 소유하는 데만 급급했다는 것인가. 한국 사회에서 ‘퍼스트 무버’가 나오지 않는 이유로 지적하는 것인가.

“모든 지식은 문제를 해결한 결과다. 그런데 문제는 내가 발견했더라도 지식은 공적인 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문제를 해결하는 자체가 윤리적 행위라는 것이다. 지식 생산자들은 문제를 발견하는 과정에서 공적, 윤리적 훈련을 자연스럽게 한다. 지식 생산인과 지식 소유인의 개념을 구분해서 이해할 필요가 있다. 결과로 얻어진 지식을 단순히 수입해서 보면 그것은 지식 소유인이지 생산인이 아니다. 엄밀하게 말하면 우리는 지식 수입국이다. 지식 교육의 핵심은 시대가 아파하는 병, 문제들에 대해 같이 아파할 수 있는 것이다.”

학생들의 생활 패턴을 봐도 남이 생산해낸 지식을 소유하게만 만드는 구조다.

“운동 시간을 빼앗아 영어, 수학 문제를 풀게 하는 것은 소탐대실(小貪大失)이다. 지식보다는 지력(智力)이 가치가 있다. 창의성이나 상상력 등인데 이건 몸으로 길러진다. 현재 학생들은 지력을 키울 여유가 없다. 운동이 고도의 지력 활동임을 알아야 한다. 보통 지덕체(智德體)라고 하는데 체덕지(體德智)가 맞다.”

결국 인격(人格)을 쌓는 교육이 미래 세대에게 절대적으로 필요하다는 결론인가.

“인격의 근본적인 속성은 무엇인가를 궁금해한다는 것이다. 궁금해 해야 대화도 이뤄지고 협치도 이뤄진다. 인격적 성장이 이뤄진 사람들은 궁금증과 호기심이 많다. 그래서 질문을 잘한다. 그러나 인격적 성장이 안 돼 있으면 오래된 신념만 집행하려고 한다. 진영의 논리에 갇힌 것은 인격적 미성숙을 의미한다. 새 시대를 원하면 이제 사람되는 일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 기쁨에 대해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맘껏 기뻐할 수 있는 토양을 제공해야 한다. 우리는 사람 되는 일이 가장 중요하다는 것을 알아야 하는 시대를 살고 있다.”

유재영 기자 elegant@donga.com ·이종승 기자 urisesa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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