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평인 칼럼]영원회귀하는 ‘동물국회’

  • 동아일보
  • 입력 2020년 1월 15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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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스트트랙으로 돌아온 동물국회
선진화법에 농락당한 보수 정당… 과반의 냉엄한 현실 깨닫고
분노를 국회 몸싸움이 아니라 선거에서의 각오로 표출해야

송평인 논설위원
송평인 논설위원
자유한국당은 패스트트랙 정국에서 완패했다. 더불어민주당이 법안을 국회선진화법이 정한 절차대로 패스트트랙에 올리는 걸 물리적으로 막은 것부터가 잘못됐다. 패스트트랙 법안을 본회의에서 처리할 때도 이를 물리적으로 막겠다고 지금 여당이 과거 야당일 때 했던 추태를 재연했다.

민주주의는 다수결이다. 민주주의의 숫자는 5분의 3이 아니고 2분의 1이다. 국회선진화법은 5분의 3의 합의를 표결의 원칙으로 하는 세계에서 드문 법이다. 5분의 3쪽만 보면 더 많은 다수의 합의를 요구하는 좋은 법인 것처럼 보이지만 5분의 2쪽을 보면 2분의 1도 안 되는 소수가 2분의 1 이상 다수의 의사 관철을 막는 나쁜 법이다. 다만 국회선진화법은 패스트트랙이란 절차가 있어서 최종적으로는 2분의 1로 돌아갈 수 있기 때문에 위헌 시비를 벗어났다.

패스트트랙은 그 말의 일상적 의미와는 달리 신속처리와는 거리가 멀다. 어느 법안을 패스트트랙에 올리는 건 길게는 1년까지 그 법안을 심사숙고해 보자는 것이다. 그러나 심사숙고는커녕 양대 정당이 싸우기만 하다가 막판에 여당이 군소정당과 야합해 표 대결로 끝냈다. 날치기 공세가 반복되고 날치기를 막는다는 명분의 몸싸움도 반복됐다. 국회선진화법이 국회를 식물국회로 만든다는 점은 입증이 끝난 것이지만 이번에는 패스트트랙이 가동되면 국회는 다시 동물국회로 돌아간다는 점도 입증됐다.

국회선진화법의 5분의 3은 세계에서 드물게 가중(加重) 다수제를 채택한 미국 상원의 3분의 2를 어설프게 흉내 낸 것이다. 미국 상원에서조차 3분의 2의 합의를 요구하는 경우는 예외적인데 대통령 탄핵 의결 때와 합법적 의사진행방해(필리버스터)를 중단시킬 때다. 문희상 국회의장은 2분의 1의 합의로 회기를 종결시키는 꼼수를 써서 필리버스터조차 있으나 마나 한 제도로 만들었다. 정작 5분의 3의 합의가 꼭 필요할 때는 5분의 3을 회피하는 파렴치한 행태를 보인 것이다.

국회선진화법이 통과된 것은 2012년 박근혜 전 대통령이 당시 여당이었던 새누리당의 대선 주자였을 때다. 민주당의 전신인 새정치연합이 야당이었을 때 던진 합의정치의 미끼를 덥석 문 것은 새누리당 대표인 황우여와 쇄신파들이었고 이를 침묵으로 승인한 것은 박근혜였다. 박근혜가 대통령에 취임한 후 내놓은 경제활성화 법안 등은 모두 국회선진화법의 5분의 3 규정에 묶여 번번이 통과되지 못했다. 남 탓 할 수 없는 자승자박(自繩自縛)이었다.

그때 왜 박근혜 정권은 여당이 다수였음에도 불구하고 식물국회 타령만 하면서 패스트트랙을 가동할 생각을 안 했는지 모르겠다. 국회선진화법에 대한 이해가 부족해 패스트트랙이 어떻게 작동할지 그려보지 못했을 수도 있고, 패스트트랙에 올릴 경우 기다려야 하는 시간을 참지 못할 정도로 조바심을 냈다고 볼 수도 있다. 개혁은 지식과 끈기로만 이룰 수 있는 것인데 둘 다 부족했다.

민주당이 정의당 등 범여권의 군소정당들에 유리한 선거법 개정을 해주는 대가로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공수처) 법안 등의 통과를 보장받았다. 민주당이 공수처법에 매달린 것은 형사사법 체계의 근간을 흔들어서라도 후환을 막으려는 것이다. 언젠가는 더러운 야합의 결과를 바로잡아야 한다. 하지만 내용적으로 야합일지라도 표결을 물리적으로 막을 수는 없다. 아니 물리적으로 막아지지 않는다. 그런 뻔한 계산도 하지 못하고 어리석게 한국당을 이끌었던 지도부는 아마추어였던 것이다.

패스트트랙에서 한국당과 범여권의 입장이 바뀌었다면 범여권에서는 또 최루탄을 터뜨리고 해머로 문을 부수는 의원들까지 나왔을지 모른다. 한국당이 그 정도까지 한 것은 아니지만 비슷한 흉내를 냈다. 정치의 품격은 의회주의를 존중하고 일관성을 지키는 데서 나온다. 앞으로 한국당이 다수의 표를 모아 패스트트랙으로 법안을 통과시킬 때 물리적으로 막는 반대편을 향해 무슨 말을 할 것인가.

운동권 의원들의 행패를 흉내 내지 않는다고 해서 웰빙 체질인 것이 아니다. 한 번은 국회선진화법이 내세운 5분의 3이라는 합의정치의 환상에 속고 또 한 번은 패스트트랙을 통해 관철되는 2분의 1의 냉엄한 현실에 당하고도 절치부심(切齒腐心)하지 못하면 그것이 웰빙 체질이다. 요란한 분노보다 조용한 분노가 더 무섭다는 걸 선거로 보여줄 수 있어야 한다.

송평인 논설위원 pisong@donga.com
#동물국회#패스트트랙#국회선진화법#보수 정당#선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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