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의 향기]불에 탄 도서관 앞으로 수천명의 시민이 모여들었다

  • 동아일보
  • 입력 2019년 10월 12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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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관의 삶, 책들의 운명/수전 올리언 지음·박우정 옮김/386쪽·1만9000원·글항아리

1986년 4월 29일 7시간 반 동안의 화재로 미국 로스앤젤레스 중앙도서관에서는 책 40여만 권이 불에 탔고, 70만여 권이 물과 연기에 훼손됐다. 화재가 난 서가에서 피해 조사를 하고 있는 소방대장 돈 스터키. 글항아리 제공
1986년 4월 29일 7시간 반 동안의 화재로 미국 로스앤젤레스 중앙도서관에서는 책 40여만 권이 불에 탔고, 70만여 권이 물과 연기에 훼손됐다. 화재가 난 서가에서 피해 조사를 하고 있는 소방대장 돈 스터키. 글항아리 제공
학창 시절 서울 종로구 정독도서관에 자주 갔다. 대부분 시험공부 하러 갔지만, 가끔씩 소설이나 역사책을 빌려 보곤 했다. 책의 뒷면에 있는 대출카드에 반납기일 도장이 찍힐 때, 앞에 빌려 본 사람들과 비밀을 나누는 듯한 느낌을 갖곤 했다. 파리 특파원 시절, 아이와 함께 자주 찾았던 파리 한국문화원 도서관에서 한국어로 된 동화책과 만화책을 빌려 품에 가득 안고 나오던 아이의 환한 미소는 아직도 잊지 못한다.

워싱턴포스트가 ‘국보’라고 일컬을 정도로 논픽션의 대가인 수전 올리언은 “나를 키운 것은 도서관이었다”고 단언했다. “도서관은 내게 자율권이 주어졌던 최초의 장소였다. 상점에서는 내가 원하는 것과 엄마가 사주고 싶어 하는 것 사이에서 줄다리기가 벌어질 게 뻔했다. 반면 도서관에서는 방해받지 않는 시간을 보낼 수 있었고 원하는 것을 뭐든 가질 수 있었다.”

올리언은 로스앤젤레스 중앙도서관을 찾았다가 “아직도 책에서 연기 냄새가 난다”는 운영자의 말을 듣고 깜짝 놀랐다. 1986년 4월 29일 미국 공공도서관 역사상 가장 큰 참사로 기록된 7시간 반 동안의 도서관 화재로 총 40만 권의 책이 불길 속에 사라졌고, 70만 권이 연기나 물에 심각하게 훼손됐다. 그는 인류의 기억과 지식이 담긴 도서관의 책이 모두 사라졌을 때 재 냄새가 가득했던 비통한 현장을 추적한다.

이 책은 방화 용의자인 금발의 배우 해리 피크에 얽힌 수수께끼를 풀어 나가는 형식을 띠고 있다. 그러나 가장 인상 깊은 대목은 불타 버린 도서관의 책을 어떻게 다시 살려냈는지에 대한 기록이다.

“불에서 살아남은 70만 권의 책들은 선반에서 떨어져 무더기로 쌓여 있거나 꽂혀 있어도 끈적끈적했다. 책 보존 전문가는 책들을 신속하게 옮겨 냉동해야 한다고 알려주었다. 불을 끌 때 뿌린 물 때문에 곰팡이 포자가 활성화되면 48시간 내에 꽃을 피우기 때문이다. 책에 곰팡이가 피면 손을 쓸 수가 없다.”

1926년 건축가 버트럼 굿휴의 설계로 건축된 로스앤젤레스 중앙도서관. 피라미드 모양 지붕이 있는 이국적인 건물로, 화재 후 7년 만인 1993년 재개관했다. 글항아리 제공
1926년 건축가 버트럼 굿휴의 설계로 건축된 로스앤젤레스 중앙도서관. 피라미드 모양 지붕이 있는 이국적인 건물로, 화재 후 7년 만인 1993년 재개관했다. 글항아리 제공
다음 날 아침. 2000여 명의 자원봉사자가 도서관에 몰려들었다. 이들은 사흘간 연기 자욱한 건물 안에서 문 밖까지 손에서 손으로 책을 전해 날랐다. 물에 젖고 연기에 그을린 책들은 냉장 트럭에 실려 섭씨 영하 56도의 창고로 보내졌다.

“이 긴급한 순간은 로스앤젤레스 시민들로 살아 있는 도서관을 이룬 것 같았다. 그토록 짧은 시간에 시민들은 공유된 지식을 보호하고 전달하는 체계, 서로를 위해 우리 스스로 지식을 보존하는 체계를 만들었다. 이것이야말로 도서관들이 매일 하는 일이었다.”

로스앤젤레스 시민들은 도서관이 잃은 책들을 다시 채울 기금을 마련하기 위해 ‘책을 구하자’라는 캠페인을 펼쳤다. 냉동한 지 2년이 지난 책들은 항공우주 제조업체 맥도널 더글러스로 보내져 우주 시뮬레이션실에서 기압과 온도를 극단적으로 올렸다 내렸다 하는 과정을 통해 수분을 제거했다. 마침내 1993년 도서관은 재개관했다.

역사적으로도 화재로 사라진 도서관이 적지 않다. 서기 640년 이슬람교도의 이집트 침략 당시 화재로 사라진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이 대표적이다. 저자의 탐사 취재를 읽다 보면 책과 도서관이 ‘생명을 가진 유기체’라는 사실을 다시 한번 깨닫게 된다.

“세네갈에서는 누군가의 죽음을 표현할 때 ‘그녀의 도서관이 불탔다’고 말한다. 개인의 의식은 한 사람의 삶을 담아낸 도서관이다. 다른 누구와도 완전히 공유할 수 없는, 죽으면 불타 사라지는 무엇이다. 하지만 그 내면의 컬렉션에서 무언가를 꺼내 책이나 이야기로 세상과 공유할 수 있다면 그 무언가는 생명을 얻게 된다.”
 
전승훈 문화전문기자 raphy@donga.com
#도서관의 삶 책들의 운명#수전 올리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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