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의 향기]‘공감’을 경계하라, 공정한 세상을 원한다면

  • 동아일보
  • 입력 2019년 8월 31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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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감의 배신/폴 블룸 지음·이은진 옮김/348쪽·1만7000원·시공사

‘공감의 배신’은 공감 역시 편견에서 자유롭지 못하다고 비판한다. 다른 공동체의 고통은 공감의 스포트라이트에서 벗어난다는 것이다. 한국인들이 미국 흑인들의 고통에 비교적 둔감한 것도 그런 탓일 게다. 2014년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열린 ‘미국의 인종차별적 경찰폭력 규탄 국제 연대 행동 기자회견’에서 침묵시위를 벌이는 참가자들. 동아일보DB
‘공감의 배신’은 공감 역시 편견에서 자유롭지 못하다고 비판한다. 다른 공동체의 고통은 공감의 스포트라이트에서 벗어난다는 것이다. 한국인들이 미국 흑인들의 고통에 비교적 둔감한 것도 그런 탓일 게다. 2014년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열린 ‘미국의 인종차별적 경찰폭력 규탄 국제 연대 행동 기자회견’에서 침묵시위를 벌이는 참가자들. 동아일보DB
원제는 ‘Against Empathy(공감에 반대하며)’다. 공감에 반대한다는 게 말이 되나? 타인에게 공감하는 덕에 사람은 고통을 겪거나 불행한 이들에게 도움의 손길을 내밀 수 있는데 말이다. 혹자는 “악은 공감의 침식(侵蝕)”이라고도 주장한다.

보통 ‘공감’이라는 단어는 “배려하고, 사랑하고, 선을 행하는 능력”과 비슷한 의미로 쓰인다. 물론 이런 능력에 저자가 반대하는 건 아니다. 미국 예일대 심리학과 교수인 저자는 공감을 “다른 사람의 입장에서 세상을 경험하는 행위”라고 정의하고, 도덕적 행동이 공감에만 의존할 때 생기는 부작용을 지적한다.

첫 번째 문제는 공감이 ‘스포트라이트’와 같아서 조명받지 못한 이들의 고통과 불행을 가려 버린다는 데 있다. 저자는 2012년 미국 코네티컷주 뉴타운의 샌디훅 초등학교에서 총기난사로 아이 20명이 살해당하자, 전 미국이 슬픔에 빠졌고 자신도 마찬가지였다고 말한다. 그러나 같은 해 시카고(범죄율이 높은 것으로 유명하다)에서 살해당한 아동들은 이 사건 피해자보다 수가 더 많지만 관심을 받지 못했다.

한 실험 결과 역시 마찬가지다. 불치병에 걸린 아이들이 고통을 덜어주는 치료를 기다리고 있다는 상황을 설정한 실험이었다. 특정 소녀에게 공감을 유도하는 말을 들은 사람들은 그 소녀의 치료를 앞당겨야 한다고 답했다. 다른 아이들은 그만큼 더 오래 기다려야 한다는 걸 인식하고 있음에도 말이다.

더구나 공감이라는 스포트라이트의 기준은 사람의 편견을 그대로 반영한다. 백인은 흑인보다 백인의 입장에 공감하기 쉽다. 다른 공동체의 고통은 관심 밖의 일이 된다. 그 결과 수단 다르푸르에서 벌어진 학살보다 한 미국인 학생이 휴가 중 실종된 사건을 TV에서 더 많이 보도한다. 미국에서 교도소의 끔찍한 상황에 대한 이야기는 관심을 받지 못한다. ‘그렇게 당해도 싼’ 이들이라고 느끼기 때문이다. 기부 프로그램의 연출자들이 외모가 반듯한 출연자를 선호한다는 것 역시 공공연한 비밀이다.

끔찍한 전쟁에 뛰어드는 일도 공감에 혐의점이 없다고 할 수 없다. 본인이 속한 공동체 속 소수의 고통에 예민하게 반응하는 감정이 다수에게 비참한 결과를 초래하는 것이다. 공감에 바탕을 둔 행동은 ‘패거리 짓기’에서 자유롭지 못할 가능성이 높다.

저자는 도덕, 연민, 친절, 사랑, 선량함, 정의를 반대하지 않는다. 다만 더 좋은 세상을 만들기 위해 공감에 의존하는 건 잘못됐으며 이성적 판단이야말로 가장 좋은 방법을 모색한다고 주장한다. 이른바 ‘효율적 이타주의’다.

하지만 공감만큼 사람을 열정적인 행동으로 이끄는 동인(動因)이 또 있을까 싶다. 무분별한 감정 이입이 꼭 좋은 결과를 가져오는 게 아니라는 주장은 특별할 것도 없는 이야기로 들리기도 한다. 저자 말마따나 제목을 ‘Against the Misapplication of Empathy(공감의 오용에 반대하며)’라고 짓는 게 불필요한 오해를 피하지 않았을까.

조종엽 기자 jjj@donga.com
#공감의 배신#폴 블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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