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이커 아닌 브랜드의 세상…유일무이 나라는 브랜드는 찾았나요?

  • 동아일보
  • 입력 2019년 11월 8일 15시 27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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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호섭 패션디자이너·홍익대 미술대 교수
간호섭 패션디자이너·홍익대 미술대 교수
말표, 노루표, 오리표를 기억하시나요? 동물농장에서 본 듯 하시다고요? 불과 몇 십 년 전만해도 친숙했던 이른바 ‘메이커’라는 상표들입니다. 말표 고무신, 노루표 페인트, 오리표 싱크대 등이죠. 이밖에도 백설표 설탕, 곰표 밀가루 등 무언가 만드는 제품이 연상되면서도 소비자들에게 쉽게 기억될 수 있는 것들을 상표(商標)나 상표명(商標名)으로 사용했죠. 말처럼 튼튼하게 달릴 수 있는 질긴 고무신, 하얀 눈처럼 새하얗고 반짝이는 설탕, 북극곰의 털처럼 폭신하고 부드러운 밀가루 등 정겹기도 하고 또한 당시 영어 교육이 보편화되지 않은 시대적 상황을 고려하면 첨단 마케팅 기법이 아닐 수 없습니다. 지금의 ‘브랜드’인 셈이죠. 또한 이 메이커들을 선호하는 소비자들에게는 무언가의 기대감이 있었습니다. 바로 차별화된 품질입니다. 이런 메이커 제품들을 구입할 때는 약간 비싼듯해도 써보면 역시 다르다는 품질에 대한 만족감이 바로 다른 종류의 메이커 제품들을 구입할 때도 그런 기대감과 함께 믿음을 만들어 냈습니다.

이런 추세에 비해 패션에서의 메이커 제품은 좀 늦은 감이 있었습니다. 패션의 기성복화가 다른 산업보다 좀 늦은 탓이겠죠. 일찍이 직물산업은 부산방직, 전남방직, 충남방직 등 지역을 대표하는 기업들이 존재했고 한일합섬, 선경직물 등 회사명을 메이커로 한 차별화된 섬유기업들도 나왔습니다. 하지만 패션산업은 1970년대에 가서야 대기업에서 반도패션, 제일모직 등으로 기성복 산업에 진출했죠. 초기에는 맞춤복에 익숙한 소비자들에게 외면 받고 고가의 가격 때문에 판매량이 저조했지만 곧 기성화 된 사이즈 체계의 정립과 빠른 시간이 중요한 자산이 된 라이프스타일의 변화 등으로 메이커 패션의 시대가 열렸습니다. 반도패션의 여성복 투피스, 제일모직의 남성복 정장을 입는 것이 과거 세대의 말표 고무신이 된 셈이죠. 그래서 백화점에서 메이커 옷을 사 입는 것이 동네 양장점이나 양복점에서 옷을 맞추는 것보다 대접받는 시대가 됐습니다. 그래서 계모임이라도 “나가서 이 옷 어디서 샀어?” “이 옷 어디거야?” 라고 물으면 “이거 백화점에서 산 메이커잖아!”라는 자랑 섞인 답변이 곳곳에서 들리곤 했습니다.

하지만 아이러니컬하게도 뒤늦게 메이커 시대에 돌입한 패션산업이 빠르게 브랜드의 시대를 열었습니다. 제조사인 메이커의 상표만으로는 세분화되는 남성, 여성, 아동, 캐주얼, 스포츠 웨어 등등의 카테고리를 다 섭렵할 수도 없었고 해외브랜드를 경험한 소비자들의 높아진 기호를 충족시킬 수도 없었기 때문이죠. 이때부터 발음하기도 어렵고 기억하기도 어렵지만 제조사의 정체성을 나타낼 수 있는 패션 브랜드들이 등장하기 시작했습니다. 잇달아 가전, 전자업체들도 제조사인 메이커를 포기하고 남성복, 여성복의 브랜드처럼 TV, 냉장고, 오디오 등의 카테고리별로 브랜드를 내세웠습니다. 가장 큰 자산 중의 하나인 집에도 브랜드 열풍이 불었습니다. 건설회사의 메이커를 전면에 내세웠던 아파트에서 어느 브랜드의 아파트에 사느냐가 중요해졌죠. 건설회사의 이름은 모델하우스의 구석에 찾아봐야 알 정도로 작아졌습니다. 시어머님이 아들집 찾기 어렵게 집을 브랜드 아파트로 이사해야 한다는 우스개 소리의 농담도 나왔습니다.

우리는 이제 패션, 가전, 자동차, 아파트까지 메이커가 아닌 브랜드의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이 모든 것을 디자인하고 설계하는 전문 인력들조차 이제는 브랜드가 되고 있습니다. 제품으로 치면 메이드 인 코리아, 메이드 인 이탈리아라는 국적보다는 어느 나라에서 교육을 받거나 어느 나라에서 활동을 하는지가 중요해졌습니다. 남녀로 태어난 성별이 중요한 게 아니라 가정과 사회에서 어떤 역할을 하는지가 중요해졌습니다. 그래서 주어진 틀에 갇히기 보다는 그 틀을 벗어나 서로 협력하는 컬래버레이션의 시대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에 패션은 여러분이 전 세계에서 유일무이한 하나의 브랜드로 도약할 때 훌륭한 도구가 될 수 있습니다. 스티브 잡스가 입은 블랙 터틀넥과 청바지 그리고 흰색 스니커즈는 더 이상 메이커 제품이 아니라 사람을 브랜드로 만드는 도구였던 것처럼요. 내가 어떤 옷이 많은지 내가 어떤 옷을 좋아하는지 옷장을 한번 들여다보세요. 나라는 브랜드는 이미 내 옷장 안에 있을지도 모릅니다.

간호섭 패션디자이너·홍익대 미술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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