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백제 귀족들 지배층에 편입… 신라의 ‘동서융합’ 집중 조명

  • 동아일보
  • 입력 2017년 10월 27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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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학대회 27일부터 이틀간 열려

백제, 신라군이 각각 진한 사투리를 쓴 것으로 묘사된 영화 ‘황산벌’(2003년). 왼쪽부터 계백장군(박중훈), ‘거시기’(이문식), 김유신 장군(정진영). 동아일보DB
백제, 신라군이 각각 진한 사투리를 쓴 것으로 묘사된 영화 ‘황산벌’(2003년). 왼쪽부터 계백장군(박중훈), ‘거시기’(이문식), 김유신 장군(정진영). 동아일보DB
영화 ‘황산벌’(감독 이준익)은 660년 황산벌 전투에서 마주친 신라군과 백제군이 각각 진한 영호남 사투리를 쓰도록 해 관객들의 웃음을 자아냈다. 신라는 백제와 고구려를 멸망시키고 “삼한을 통일했다(一統三韓)”고 자부했지만 후삼국 시대 백제와 고구려의 계승이 건국의 슬로건으로 내걸린 사실은 당시에도 ‘지역감정’이 만만치 않았다는 걸 보여준다.

역사학계 최대 연례행사인 전국역사학대회가 27, 28일 서울 성북구 고려대에서 ‘역사전환기 이상과 현실’을 주제로 개최된다. 대회 둘째 날에는 신라사학회와 백제학회가 공동으로 학술대회 ‘한국 고대 동서 지역 간 갈등과 극복’을 연다.

대회에서는 신라가 멸망한 백제 유민을 대상으로 편 융합정책이 조명된다. 최희준 고려대 한국사연구소 연구원은 “백제 멸망 뒤 673년 유민들이 만든 계유명전씨아미타불비상(癸酉銘全氏阿彌陀佛碑像)의 명문(銘文)에는 조성한 이들이 신라의 관등으로 기록돼 있다”며 “옛 백제의 중앙 귀족들이 신라 지배층으로 새롭게 진입했음을 알 수 있다”고 말했다. 또 신라가 효율적 통치를 위해 옛 백제지역의 지방 세력을 향리(鄕吏)나 촌주(村主)로 편제해 기득권을 인정하고 경제적 기반을 유지시켰다고 봤다.

전덕재 단국대 사학과 교수는 발표문 ‘통일전쟁기 신라·백제 지배체제와 수취체계의 변동’에서 “신라가 통일 이후 중간 행정단위로서 군(郡)의 기능을 강화하는 방향으로 지방 통치조직을 재편한 건 백제의 지방제도를 일부 반영했음을 시사한다”고 말했다.

물론 융합정책이 성공적으로 추진된 것만은 아니었다. 조인성 경희대 사학과 교수는 발표문 ‘통일에서 분열로―후백제의 성립을 중심으로’에서 “문무왕이 유언으로 웅천주 출신의 백제계 승려인 경흥법사를 국사(國師)로 삼을 것을 부탁했는데, 아들 신문왕은 (그러지 못하고) 국로(國老)로 삼았다”며 “이는 신라 지배층이나 불교계의 반발 때문이었을 수 있다”고 말했다. 국사는 당시 나라에서 가장 높은 승직(僧職)이고, 국로는 일종의 특별직이다.

또 조 교수는 “경덕왕 대에 왕권 강화를 위해 전통적인 군현의 이름을 중국식으로 바꾸자 지방 세력이 반발했을 것”이라며 “혜공왕 대에 다시 원래 지명으로 되돌렸는데, 이는 백제 고구려 유민들의 유민 의식을 일깨우는 계기가 되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 밖에 학술대회에서는 ‘7세기 중반 백제·신라의 정치체제와 대외정책’ ‘신라·백제의 문화적 특성과 융합’ ‘신라·백제 지역 간 교통로의 개설과 운영’ ‘백제 미술의 신라 전파와 수용’ 등이 발표된다.
 
조종엽 기자 jjj@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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