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년전 홍콩 밤거리서 보드카에 취해 듣던 노래가 내 가슴에…”

  • 동아일보
  • 입력 2019년 9월 18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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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작 ‘커밍 홈 어게인’에 이문세의 ‘옛사랑’ 삽입한 웨인 왕 감독

홍콩 출신 미국 영화감독 웨인 왕은 “내 작품 ‘차이니즈 박스’에서 홍콩 반환을 어둡게 그렸을 때 비판도 받았지만 실제로 반환 뒤 홍콩에서 원칙과 민주주의가 쇠퇴했다. 한국의 민주화운동이 현재 홍콩 시위에 큰 영감을 줬다고 확신한다”고 했다. Asian Shadows 제공
홍콩 출신 미국 영화감독 웨인 왕은 “내 작품 ‘차이니즈 박스’에서 홍콩 반환을 어둡게 그렸을 때 비판도 받았지만 실제로 반환 뒤 홍콩에서 원칙과 민주주의가 쇠퇴했다. 한국의 민주화운동이 현재 홍콩 시위에 큰 영감을 줬다고 확신한다”고 했다. Asian Shadows 제공
“보드카에 취해 이문세의 노래를 듣던 그 밤, 그 순간을 결코 잊지 못할 겁니다.”

영화 ‘스모크’ ‘조이 럭 클럽’으로 세계 영화계에 족적을 남긴 웨인 왕 감독(70)이 신작 ‘커밍 홈 어게인’에 대해 말했다. 미국 장편영화 사상 처음으로 한국 가요가 주요 테마로 등장하는 ‘커밍 홈 어게인’은 다음 달 6일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아시아 최초로 상영된다.

토론토 국제영화제(15일 폐막) 참석 후 미국 캘리포니아주 샌프란시스코의 자택에 머무는 왕 감독을 e메일로 인터뷰했다. 왕 감독은 이문세의 ‘옛사랑’을 영화에 수록하게 된 배경에 대해 자세한 이야기를 들려줬다.

“홍콩 반환(1997년 7월 1일)을 목전에 둔 때였습니다. 홍콩의 거리에서 영화 ‘차이니즈 박스’(제러미 아이언스, 궁리 주연)의 막바지 밤샘 촬영을 하고 있었죠. 새벽 2, 3시쯤 되니 기온이 뚝 떨어졌어요. 추위를 달래려 근처 24시간 편의점에 들러 보드카를 샀죠.”

일행은 길가에 주저앉아 싸구려 보드카를 나눠 마시며 휴식을 취했다. 마침 편의점 스피커에선 일본 발라드 곡들이 흘러나왔다. 애달픈 곡조를 듣던 촬영감독이 머나먼 고향 슬로베니아에서 아이들을 돌보고 있을 아내가 너무 그립다고 털어놨다. 그는 에미르 쿠스투리차 감독과의 작업으로도 유명한 빌코 필라치(1950∼2008·‘집시의 시간’ ‘언더그라운드’)였다.

“마침 현장에 있던 한국인 제작 보조가 일본보다 한국의 발라드가 더 애절하다면서 몇 곡 찾아 틀어줬죠. ‘한국의 팝 아이콘’이라며 이문세의 노래도 여럿 들려줬습니다.”

필라치 촬영감독은 그중 ‘옛사랑’을 듣다 가사 해석을 부탁했다. 왕 감독은 “설명을 듣던 필라치가 북받쳐 울면서 나를 끌어안더니 볼에 입을 맞췄다. 그 순간을 결코 잊지 못한다”고 했다.

왕 감독은 1995년 재미 소설가 이창래 씨가 ‘뉴요커’에 기고한 자전적 에세이 ‘커밍 홈 어게인’을 읽고 큰 감동을 받았다. 이 작품을 영화로 만들고 싶었던 그는 지난해 본격적으로 연출 준비를 하면서 자연스레 ‘옛사랑’을 떠올렸다.

“극 중 주인공 창래의 아버지가 다른 사랑을 했었음을 은유하는 노래로 제격이었죠. 창래의 어머니는 갑자기 ‘옛사랑’을 즐겨 듣는 남편의 외도를 의심하지만 학자인 남편은 1960∼80년대 한국 발라드의 발전 양상을 연구하는 중이라며 변명해요.”

왕 감독은 할리우드 영화 최초로 아시아계 배우로 출연진을 꾸려 연출한 영화 ‘조이 럭 클럽’(1993년)으로 극찬을 받았다. 당시 중국계 이민자들의 세대 간 갈등과 화해를 그린 그에게 신작 ‘커밍 홈 어게인’ 역시 특별한 작품이다. 영화는 주인공 창래(저스틴 전)가 위암에 걸린 어머니를 간호하며 벌어지는 일을 다뤘다. 창래가 갈비, 전, 잡채 등 한국 음식을 정성스레 만드는 장면들은 ‘옛사랑’과 함께 세대 갈등과 가족애에 관한 은유로 기능한다.

영화 ‘커밍 홈 어게인’에서 창래(저스틴 전·오른쪽)가 어머니(재키 정·한국명 정시내)를 간호하는 장면. Asian Shadows제공
영화 ‘커밍 홈 어게인’에서 창래(저스틴 전·오른쪽)가 어머니(재키 정·한국명 정시내)를 간호하는 장면. Asian Shadows제공
“‘커밍 홈 어게인’을 읽고 몇 년 뒤 어머니가 파킨슨병으로 시한부 선고를 받으셨습니다. 2012년 어머니가 돌아가신 뒤 영화화에 대한 의지가 더 굳어졌죠.”

왕 감독은 ‘커밍 홈 어게인’을 의식적으로 ‘조이 럭 클럽’과 판이하게 연출했다. “매우 느린 호흡의 연출로 관객 각자가 자신의 부모와 삶의 변화에 대해 숙고하게끔 했다”는 것.

홍콩에서 태어나고 자란 왕 감독은 고교 졸업 후 의대에 진학하러 미국에 건너갔다. 그는 “1960년대 샌프란시스코에서 급진적이고 열린 시각을 지닌 학생으로 변모했고 결국 의사의 길을 포기했다”고 돌아봤다. 부친이 지어준 웨인이란 이름도 미국 배우 존 웨인에서 딴 것. 영화감독이 된 뒤 예술영화부터 ‘러브 인 맨하탄’(2012년) 같은 할리우드 상업영화까지 다양한 스펙트럼을 아울렀다.

왕 감독은 다음 달 부산국제영화제 현장을 직접 찾을 계획이다. 그는 앞서 1998년 ‘차이니즈 박스’가 개막작으로 초청됐을 때도 제러미 아이언스와 함께 방한했다. 위안부에 관한 영화를 제작하고 싶다는 꿈도 있다. 그는 “이미 2000년과 2014년 위안부 관련 영화의 투자와 캐스팅을 위해 한국을 찾았다”고 털어놨다.

“2000년에는 이창래 작가의 소설 ‘척하는 삶’에 기반한 작품을 준비 중이었습니다. 위안부 소재 영화에 투자자를 구한다는 것은 대단히 어려운 일이더군요.”

왕 감독은 이번 방한 때 한국의 고교생과 대학생들을 만나 직접 이야기를 나눠보고 싶다는 뜻도 밝혔다.

“앞으로는 ‘커밍 홈 어게인’이 그랬듯 자본의 간섭을 덜 받는 독립영화 형태로 작업을 이어가고 싶습니다. 울림을 주는 아시아계 미국인 이야기를 여러 편 더 영화로 만드는 것이 소망입니다.”

임희윤 기자 imi@donga.com
#웨인 왕#커밍 홈 어게인#이문세 옛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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