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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구장 첫골 신호로 “독립만세”… 가슴속 태극기 꺼내 휘날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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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구장 첫골 신호로 “독립만세”… 가슴속 태극기 꺼내 휘날려

사천=성동기 기자 입력 2019-08-17 03:00수정 2019-08-17 03: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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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 3·1운동 임정 100년, 2020 동아일보 창간 100년]
3·1운동 100년 역사의 현장 2부 <제69화> 경남 사천
올해 3월 21일 사천초등학교 운동장에서 열린 축구경기 만세운동 재현 행사에서 학생들이 100년 전 선배들이 그랬던 것처럼 일본군 앞에서 만세를 부르고 있다. 사천시 제공
경남 사천시는 매년 3월 21일에 축구 경기를 열어 3·1절을 기념한다. 100년 전 이날 사천공립보통학교 운동장에서 펼쳐졌던 축구 만세시위를 기리기 위해서다. 2001년 시작해 벌써 19년째다. 별도의 3·1절 기념행사를 갖지 않는 대신 이날 행사에는 학교와 총동창회뿐만 아니라 사천시와 지역사회, 관련 단체들이 모두 참여한다.

올해에도 사천읍에 위치한 사천초등학교(사천공립보통학교의 후신) 운동장에서 축구 경기를 개최한 뒤 만세운동 재현 행사를 벌였다. 특히 올해에는 △첫 골과 함께 가슴속에서 태극기 꺼내 흔들기 △운동장 돌다 가로질러 나가기 △학교 건물에 내걸린 일장기 떼어내고 태극기 게양하기 △거리 시민과 함께 만세운동 등과 같은 이벤트가 펼쳐졌다. 또 총동창회가 바위로 만든 ‘독립만세 100주년 기념비’를 정문 앞에 세웠다.

3·1만세운동의 불길이 전국으로 확산되던 1919년 3, 4월 사천지역도 예외는 아니었다. 3월 13일 곤양면을 시작으로 4월 19일까지 20여 차례의 크고 작은 시위가 이어졌다. 그중에서 사천보통학교 축구 경기가 사천지역을 대표하는 항일시위로 자리매김한 것은 주변 지역으로 시위를 확산시키는 도화선이 됐기 때문이다. 강신우 사천문화원 부원장은 “일제 군경이 축구만세시위를 주동했다는 이유로 어린 학생들에게 혹독한 고문을 가한 사실이 알려지면서 사천 지역 주민들의 분노가 폭발했다”고 말했다.


○ 첫 골을 신호로 만세를 외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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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천은 서부 경남의 중심 도시 진주와 가까워 서로 왕래가 많은 곳이다. 사천읍 만세시위 주동자 황순주 박기현 김종철은 3월 18일 진주 만세시위 소식을 듣자마자 진주로 달려갔다. 수만 명이 진주성 일대에서 태극기를 들고 만세를 외치는 장면을 목격한 이들은 독립선언서를 구한 뒤 사천읍으로 돌아왔다. 이에 앞서 서울의 3·1운동 소식을 듣고 상경했던 천도교 사천교구 책임자 장태영은 천도교 총본부에서 독립선언서를 받은 뒤 진주의 천도교인들에게 전달하며 진주 만세시위를 도왔다.

1920년대 사천공립보통학교 교문을 나서는 학생들 모습. 독립기념관 제공
‘사천항일독립운동사’ 등에 따르면 독립선언서를 손에 넣은 황순주 등 3인은 거사할 동지들을 모았다. 사천보통학교 졸업반 학생 이윤조를 설득해 참여시켰다. 그를 통해 보통학교 학생들을 만세시위에 동참시킬 계획이었다. 이들은 사천보통학교 졸업식이 열리는 3월 21일을 거사일로 정하고 태극기 200여 장과 독립선언서들을 몰래 인쇄했다.

졸업식 직후 시위를 하는 계획은 입에서 입으로 학생들에게 퍼져 나갔다. 거사 당일이 밝자 학생들은 비밀리에 건네받은 태극기를 가슴에 품은 채 등교를 했다. 졸업식 식후행사로 준비된 축구 경기가 열린 운동장이 거사 장소로 결정됐다. 이윽고 경기가 열리고 이윤조가 속한 팀이 후반전에 첫 골을 터뜨리자 이윤조는 품 안에 숨겨뒀던 태극기를 꺼내 “대한독립만세”를 외쳤다. 그때 현장에 있던 일본인 교장은 교사들에게 그를 붙잡으라고 소리쳤다. 운동장에서 추격전이 펼쳐지자 학생들은 일제히 태극기를 꺼내 만세를 외치기 시작했다.

이후 학생들은 교문 밖으로 진출해 본격적인 길거리 시위에 나섰다. 길가의 주민들까지 시위에 가세했다. 학교 측의 신고를 받고 출동한 일제 헌병대는 진압에 나섰고, 학생들을 체포했다. 주동자로 지목된 이윤조는 2주간 옥고를 치른 뒤 반신불수의 몸으로 석방됐다.


○ 시위 주동 3인의 격문 투척 의거


시위를 주도했던 황순주 등 3인은 서당 스승의 집으로 피신해 체포를 면했다. 이들은 은신 중에도 격문을 써 돌멩이에 묶은 뒤 헌병분견대장 집에 던지는 대담성을 보였다. 격문에는 “일본제국주의 앞잡이들은 우리 민족에 대한 야만적인 살육 행위를 중단하고 철퇴하라”는 도발적인 문구가 담겨 있었다. 분노한 분견대장은 병력을 풀어 이들을 체포했고, 혹독하게 고문한 뒤 진주감옥으로 보냈다. 이들은 3개월 만에 가석방됐다. 박기현은 고문의 후유증으로 평생 불구가 됐다.(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독립운동사’)

사천보통학교 시위는 20여 일 뒤인 4월 14일 사천읍 중선리포구 도로공사장 만세시위로 이어졌다. 도로 보수공사 인솔자 유승갑은 어린 학생들의 의거 소식에 고무돼 시위 계획을 세웠다.

거사 당일 하루 일과가 끝난 뒤 유승갑과 손계묵 등은 부역 나온 주민 100여 명 앞에 섰다. “오늘 우리가 왜놈들에게 나라와 주권까지 모두 도적맞고 우리는 또 이렇게 강제 부역으로 혹사까지 당하고 있으니 이 얼마나 원통하냐. 우리도 독립만세를 불러 시위를 벌이자.”

주민들은 삽과 괭이를 높이 들고 사천읍을 향해 행진하며 만세를 외쳤다. 인근 주민들이 합류하면서 시위대는 수백 명으로 불어났다. 출동한 일제 헌병 10여 명은 삽과 괭이를 흔들며 살기등등한 시위대를 보고 처음에는 쉽게 덤벼들지 못했다. 나중에 총에 칼을 꽂고 본격적인 시위 진압에 나서면서 유혈 사태가 발생했다. 주동자 중 한 명인 손계묵(건국훈장 애국장)은 혹독한 고문을 받다 부산형무소에서 옥중 순국했다. 유승갑은 태형 90대를 맞았다.(‘경상남도 각 시군의 3·1독립운동’)


○ 조직력 돋보인 삼천포 시위


1919년 3월 당시 사천의 남쪽에 위치한 삼천포항과 주변 일대(옛 삼천포시)에서도 만세시위가 거세게 펼쳐졌다. 삼천포는 농사도 짓고 고기잡이도 했지만 일제의 수탈로 생활고가 극심한 지역이었다.

남양면 출신 박종실은 진주에서 독립선언서를 구해온 뒤 평소 친분이 있던 삼천포공립보통학교 교사 황병두를 찾아갔다. 독립선언서를 보여주면서 전교생을 의거에 동원할 것을 제안했지만 황 교사는 난색을 표했다. 박종실은 이에 굴하지 않고 2번을 더 찾아간 끝에 협력하겠다는 약속을 받아낸다. 그가 삼천포보통학교 학생들을 참여시키려 애쓴 것은 이를 통해 주민들의 심리를 자극할 수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이 밖에 삼천포 시위에는 김우열 강금수 장지제 고광세 같은 청년들도 참여하기로 했다.(‘사천항일독립운동사’)

사천초등학교 총동문회가 축구 만세시위 10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올해 3월 학교 정문 앞에 세운 기념비. 사천=성동기 기자 esprit@donga.com
주동자들은 삼천포보통학교 졸업식 날이자 삼천포 장날인 3월 25일을 거사일로 정했다. 작은 태극기들을 만들고 마을별로 비상연락망을 구축했다. 학생, 청년대, 주민 등으로 나눠 3곳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시위를 벌이기로 했다. 삼천포보통학교 학생들로 이뤄진 제1대는 학교가 있는 노산공원, 청년대가 주축인 제2대는 시가 중심에서 가까운 해변, 주민들로 구성된 제3대는 선구리시장을 각각 맡았다. 성경찬 사천문화원 향토사연구소장은 “바다와 맞닿은 지형 특징을 살려 시위 계획을 세운 것”이라며 “시내 중심으로 향할 수 있는 장소들”이라고 설명했다.


○ 독립가 부르며 일제 군경에 맞서


마침내 거사일이 밝았다. 학생들은 일본인 교장이 제국주의 교육의 상징인 교육칙어를 낭독하면 시위에 돌입하기로 계획을 짰다. 하지만 가슴에 태극기를 품고 등교한 학생들은 흥분을 이기지 못하고 졸업식 전에 거사에 돌입했다.

간부 학생인 박상윤과 박종대가 선두에 서서 만세를 부르며 교문을 박차고 시내로 향했다. 갑작스러운 시위에 당황한 일제 경찰은 총검으로 학생들을 때리며 주동자들을 체포했다. 이후 일경은 시내 전역에서 삼엄한 경계망을 펼쳤다.

소식을 접한 청년대는 거사 장소를 해변에서 시장으로 바꾸었다. 주민들과 한곳에서 힘을 모으기로 한 것이다. 강금수가 시장 중앙에 설치한 단상에 올라 독립선언서를 큰 소리로 낭독한 뒤 500여 명의 시위대가 일제히 만세를 외쳤다. 이후 주민들의 시위 참여를 독려하기 위해 ‘독립가’를 부르며 거리시위를 펼치기 시작했다.

‘4000여 년 찬란한 역사국으로 오늘날 이 지경이 웬일인가! 천부의 자유권은 사(私)가 없거늘 우리 민족은 무슨 죄로 욕을 당하는가! 철사(鐵絲)로 결박한 줄을 우리의 손으로 끊어 버리고 독립만세 외치는 우레 소리에 바다가 끓고 산이 동(動)하네.’

지역 주민들이 시위대에 동참하면서 시위대 규모가 1000명을 넘어섰다. 진압에 나선 일경은 선두에서 대형 태극기를 흔들던 고광세를 총대로 때리며 전진을 막았다. 하지만 그는 피를 흘리면서도 시위대를 이끌어 갔다. 시위대가 경찰서 인근에 위치한 문선교를 통과하자 일경 50여 명과 기마경찰들이 길을 막고 총칼을 휘두르며 시위 대열을 허물었다. 붙잡힌 주동자들 중 강금수 고광세 등 7명은 징역 10개월 형을 선고받고 진주감옥에서 옥고를 치렀다.(‘삼일운동실록’)

사천=성동기 기자 esprit@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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