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 좌초될 위기서 기적같은 일이…닻(앵커)의 놀라운 힘

  • 동아일보
  • 입력 2019년 6월 20일 14시 35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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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pixab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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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박에 부속하는 물건 중 닻만큼 신기한 기능을 가진 것도 없다. 크기는 10t 남짓. 이것이 바다에 놓이면 10만 t 배도 제자리에 선다. 닻을 놓으면 닻을 축으로, 닻줄을 반경으로 선박이 조류와 바람에 따라 회전한다. 닻은 갈고리처럼 생긴 날개를 가진다. 이 날개가 바다 속 펄에 박히면 큰 힘이 발생한다.

닻과 관련된 한 일화가 교훈처럼 내려온다. 청명한 날씨인데 위치를 내어보니 이상하게 배가 얼마 전진하지 못했다. 기관이 선체에 문제가 있는지, 선창에 물이 들어왔는지 확인시켰지만 아무 이상이 없었다. 또 하루를 더 항해했다. 다음날 ‘아차’ 싶어 선수에 나가 보라고 했더니 닻이 풀려있었다. 닻의 정지 장치가 풀려서 길이 200m의 닻줄과 함께 바다에 내려가 있었다. 선장은 회사에 물어보지도 않고 닻을 용접으로 잘랐다. 사후 보고를 하자 회사에서 난리가 났다. 배에는 모든 것이 2개 비치돼 있다. 1개의 닻이 없어도 다른 쪽 닻을 사용하면 된다. 선장은 이렇게 간단하게 생각했다. 그렇지만 닻은 법정 비품이라 2개를 달지 않고는 출항할 수 없다. 닻을 달기위해 조선소에 들어가 일주일을 보냈고 그만큼 영업 손실이 났다. 선장은 하선조치를 당하고 징계를 받았다.

현장의 선장은 어떻게 처리했어야 할까. 선박을 수심이 100m 정도 되는 곳으로 이동시키면 닻이 육지에 닿게 되고, 닻의 힘이 약해져서 선박의 유압장치로 끌어올릴 수 있다. 한바다에서는 10t 짜리 닻과 200m 닻줄을 선박의 유압장치로 끌어올릴 수 없다. 선장 시절, 선배로부터 이런 교훈을 들었다.

몇 년 후, 미국 콜롬비아강의 롱뷰에서 곡물을 실을 때였다. 곡물을 넣어주는 장비의 위치가 고정돼 있어 우리 배를 이동시켜야만 했다. 하루에도 몇 번씩 배를 잡는 밧줄을 풀어주고 감아주며 배를 옮겼다. 콜롬비아강에서 내려오는 강물의 유속이 빨랐다. 부두와 1~2m 간격을 둔 채 배를 앞뒤로 이동해야하는데, 어느 순간 5m, 10m로 간격이 벌어졌다. 선수와 선미의 유압장치로 밧줄을 감았지만 소용이 없었다. 배는 점차 부두와 멀어졌다. 총 책임자였던 나는 당황했다. 밧줄은 끊어지기 시작했고 선수에 있는 밧줄 하나만이 육지와 연결돼 있었다. 배는 강의 한복판으로 나가 좌초될 위기에 처했다. 이 때 경험 많은 갑판장이 화급하게 “초사님, 닻을 놓읍시다. 닻을 놓자고요”하고 말했다. 나는 정신을 차려 “렛 고, 앵커”를 명했다. 브레이크 밴드를 풀자 ‘와르르’하며 닻이 내려갔다. 기적같이 우리 배는 그 자리에 바로 섰다. 부두에서 이 광경을 보던 하역 인부들이 환호성을 질렀다.

닻의 영어이름은 ‘앵커’다. 이렇게 중요한 기능을 하다 보니 TV 방송에서 뉴스 진행자를 앵커라 부른다. 앵커는 뉴스를 전달하고, 현장 기자와 전문가를 부르고, 중요도에 따라 방송순서를 정하기도 한다. 앵커를 중심으로 뉴스가 진행된다. 전국의 시청자들이 그를 통해 뉴스를 전달받는다. 시청자들은 대형선박에 해당하고, 뉴스 진행자는 닻의 역할을 하는 것으로 비유될 수 있다. 이렇듯 선박의 앵커는 선박과 화물의 안전에 중요한 기능을 하고 방송에서의 앵커는 국민의 알권리를 보장하는 중요한 기능을 하는 소중한 존재다.

김인현 고려대 법학전문대학원교수·선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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