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독립 만세” 만삭의 몸으로 파주 첫 만세운동 이끈 임명애 열사

  • 동아일보
  • 입력 2019년 2월 19일 16시 08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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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 파주시 교하초등학교 교정에는 최근 100㎡ 규모의 터가 꾸려졌다. 3·1운동 100주년을 맞아 독립운동기념비가 세워지는 자리다. 파주시는 3·1절 기념식에 맞춰 이 기념비를 공개할 예정이다.

파주시는 3·1운동 60주년을 1년 앞둔 1978년 3월 1일 광탄면에 ‘3·1운동 발상비’를, 조리읍 봉일천리에 ‘3·1운동 기념비’를 각각 세웠다. 교하초등학교의 기념비는 느지막이 서는 셈이지만 만세운동 100년을 맞아 건립돼 의미가 크다. 이곳은 100년 전 파주시 일대에서 펼쳐진 만세운동들의 도화선이 된 장소이기도 하다.

●“흰옷 입은 농민들로 산은 하얗게 변했다”

파주시 발랑리 태극기마을
파주시 발랑리 태극기마을
‘3월 10일 와석면 교하리(현재 교하동) 공립보통학교 운동장에서 그곳에 집합한 그곳 학생 100여 명을 동원하여 대한독립만세를 부르고 시위운동을 계획하였다.’(국사편찬위원회, ‘한국독립운동사 2권’-파주군)

대부분의 중학교가 도회지에 밀집돼 있어 파주에선 보통학교가 젊은이들을 만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장소였다. 학생들이 교하공립보통학교에 모여 조선독립만세를 외칠 수 있었던 이유다.

만세의 함성이 교정 너머로 널리 울려 퍼졌지만 이날의 시위가 파주 곳곳으로 번지는 데는 시간이 걸렸다. 지역 주민들은 만세운동의 확산방법을 고민했고, 첫 시위 뒤 보름 만인 3월 25일, 교하리의 열여섯 살 학생 김수덕과 스물네 살 농민 김선명이 구세군 교인인 염규호 임명애의 집을 찾아와 “조선독립운동에 관한 의논을 하고자 하니 방을 빌려 달라”고 청하면서 시위는 본격적으로 전개됐다. 한 방에 모인 네 명은 머리를 맞댔고, “독립운동을 하려면 격문을 배포해 사람들을 모을 필요가 있다”는 데 의견을 모았다. 염규호가 원고를 작성했고, 김수덕이 등사판을 가져와 격문을 인쇄했다. “동리 산으로 일동은 모이라. 집합치 않는 자의 집에는 방화할 것이다”라는 게 원고 내용이었다. 극단적이었지만 그만큼 주민들의 만세 시위 참여를 강력하게 촉구하는 의지를 담은 표현이었다.

파주시 발랑리 태극기마을
파주시 발랑리 태극기마을
인쇄된 60여 장 격문이 인근 마을 곳곳에 배포됐다. 이틀 뒤인 3월 27일 약속된 시위장소에 모인 사람들은 700여 명에 달했다. 시위대는 대열을 지어 면사무소를 에워싸고 면 서기들에게 업무 중단을 요구하면서 유리창을 부수었다. 시위대의 거사를 보고 합류하는 사람들이 늘어났다. 1500여 명으로 불어난 주민들은 교하헌병주재소로 행진했고, 놀란 헌병들이 파주 헌병분소에 병력지원을 요청했다. 일제 병력은 시위대를 향해 총구를 겨누었고 주민 1명이 숨지게 된다.

이날 파주에서 만세운동이 일어난 곳은 와석면 뿐만이 아니었다. 인근 청석면에서도 격렬한 시위가 벌어졌다. ‘한국독립운동사’는 전날인 3월 26일 청석면 일대 높은 산들에 “봉화불이 널려져 있고 곳곳에서 만세 부르는 소리에 천지가 진동했다”고 소개하고 있다. 다음날의 만세운동을 예고하는 봉화였다.

27일 청석면의 높은 산인 심악산에 백의(白衣)의 군중이 모여들었다. 수백 명의 농민들로 산은 하얗게 변했다. 교하공립보통학교 학생들이 선두에서 태극기를 들었고, 군중들이 뒤를 따르면서 면사무소로 행진했다. “면장은 나와 만세를 부르라”는 군중의 외침에 면장이 나와서는 “진정하라”고 했다. 시위대 중 몇 명이 돌을 던졌고 면사무소 건물의 기와와 유리창이 깨졌다. 면장도 같이 만세를 부르다가 “해산해서 집으로 돌아가라”고 권했지만, 시위대는 듣지 않고 교하헌병주재소로 향했다. 일제 병력에 의해 와석면의 시위자가 죽었다는 소식을 접한 이들은 행진을 중단하고 훗날을 도모하기로 한다.

●19인 동지회가 주도한 공릉장 만세운동

파주시 발랑리 태극기마을
파주시 발랑리 태극기마을
파주시 광탄면 신산리에는 독립운동가 심상각(1888~1963)의 묘가 있고 생가도 보존돼 있다. 3·1운동에 참가했던 그는 중국 상하이로 망명해 상해농업전문학교에서 신교육을 받는 한편 상해임시정부에 참여해 독립운동을 펼쳤다. 10여 년 임시정부 활동을 한 뒤 귀국해 신간회에 가입해 활동하다가, 고향 광탄면에 광탄보통학교를 설립하고 교장에 취임한 뒤 교육에 헌신했다. 그는 신흥무관학교 교감이었던 윤기섭,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체포됐던 정태진, 광복군으로 활동하면서 항일운동을 벌인 장준하 등 파주 출신 독립운동가의 선배이기도 했다.

심상각은 파주 3·1운동 당시 ‘19인 동지회’ 멤버 가운데 한 명이었다. 19인 동지회는 3월 28일 공릉장에서 펼쳐진 파주 최대 규모의 시위를 주도한 이들이다. 심상각과 김웅권, 권중환, 심의봉 등 주민들로 구성된 ‘19인 동지회’는 시위를 앞두고 치밀한 계획을 세웠다. 특히 “3월 10일 교하공립보통학교 시위 때만 해도 학생과 지식인의 선도적인 투쟁으로 이뤄졌지만, 3월 말 시위가 파주 곳곳에서 재개됐을 때는 농민 등 기층세력이 전면에 부상한 수평적 만세운동이었다”는 게 이윤희 파주지역문화연구소장의 설명이다. 실제로 19인 동지회 다수가 농민이었다. 이들은 광탄면 발랑리에 본부를 차렸고 꼼꼼하게 군중 동원 작전을 세웠다. 파주군내 지역 주민은 물론 고양군민도 참여시키는 큰 계획이었다. 부준효 광복회 파주지회장은 “조직적인 시위를 기획했고, 이 과정에서 다른 지역의 원정 시위대를 참여시켜 폭발력을 높였다는 게 파주 공릉장 시위의 특징”이라고 말했다.

파주시 발랑리 태극기마을
파주시 발랑리 태극기마을
이들의 주도면밀한 전략과 준비작업으로 당일 광탄면사무소 앞에는 2000여 명에 달하는 군중이 모였다. 마침 전날 광탄면 발랑리 주민들이 인근 동리 주민 수백 명과 함께 광탄면사무소 앞에서 만세시위를 벌인 터여서 분위기가 고조돼 있었다. 이날 모인 시위대가 조리면 공릉시장으로 행진하면서 1000여 명의 주민들이 합세해 군중은 3000여 명으로 불어났다. 시위 군중들은 조리면사무소 건물과 집기 일부를 파손하고 면장과 면서기를 앞세워 공릉시장까지 나아갔다. 이어 봉일천 헌병주재소에서도 공세적 시위를 전개하며 행진을 벌였다. 하지만 이들에 맞선 헌병들의 무차별발포로 6명이 사망했고 수십 명이 부상하는 참사가 벌어진다.

‘파주독립운동사’와 ‘파주전투사지’에는 피살자 중 한 명인 김남산과 관련해 당시 상황을 상세하게 묘사하고 있다. 그는 부모의 묘소에서 풀베기를 하던 중 만세운동소식을 접하고는 일을 동생에게 맡기고 시위에 뛰어들었다. 김남산은 태극기를 들고 선두로 나서 행진하다 일본 군부대의 총격에 어깨를 맞아 쓰러졌고, 병원에 후송됐으나 숨졌다. 힘이 장사였다는 그가 희생되자 “천현면(김남산의 거주지) 사람들 다수가 애석하게 여기고 있는 터”라고 ‘파주전투사지’는 적고 있다. 3월 30일 천현면에서는 김남산의 장례식이 열렸고 주민들은 일제의 만행에 항의하는 추모만세 시위를 벌이기도 했다.

한국독립운동사는 ‘파주군’ 편에서 대대적인 시위가 벌어진 며칠 뒤 “‘만세 부른 사람을 잡아간다’는 말이 떠돌았다”고 기록했다. 혹여 잡혀갈까봐 “순박한 농민들은 집을 비워두고 밖으로 나아가 밤을 지내는 형편이었다”면서 “농사철에 접어들면서부터 세상은 조금 가라앉아 농민들은 마음 놓고 일하였다”고도 했다. 이어 “웬일인지 이 해는 가뭄과 태풍으로 흉년이었다”고 끝맺었다. 당시 만세운동으로 파주 지역 농민들이 겪어야만 했던 고통의 크기가 100년이 지난 지금에도 고스란히 느껴진다.

19인 동지회의 본부가 차려졌던 광탄면 발랑리는 2012년 태극기마을로 선정됐다. 발랑1리에서 3리까지 180가구에 태극기를 게양했고, 독립공원 게양대 100여 개, 가로수 100여 그루 등에 태극기를 게양했다. 이곳에선 1년 내내 태극기가 나부낀다. 무궁화심기 캠페인도 이어져, 여름이면 태극기 아래 활짝 핀 무궁화를 만날 수 있다.

올 3월 1일에는 100년 전 대규모 시위가 열렸던 공릉장이 있는 조리읍 봉일천리의 3·1운동 기념비 앞에서 기념식과 음악회가 개최된다. 파주시내 5개 학교의 학생들과 광복회 회원들도 만세삼창을 외치면서 그날의 함성을 재현하는 거리행진을 벌일 계획이다.

파주=김지영 기자 kimjy@donga.com

▼ 만삭의 몸으로 독립을 외친 임명애 열사▼


1919년 3월 10일 교하공립보통학교에서 파주의 첫 만세시위가 벌어졌을 때 앞장섰던 사람은 임명애(1886~1938)였다. 구세군 교인이었던 그는 운동장에 모인 학생들 앞에서 “조선 독립 만세”를 선창했다. 임명애의 외침을 따라 학생들도 일제히 만세를 외쳤다.

파주의 여성 독립운동가 임명애의 생애를 담은 창작 뮤지컬이 제작된다. 파주시가 추진하는 3·1운동 100주년 기념사업 중 하나다.

임명애의 이름은 독립운동사에서 자주 볼 수 있다. 3월 25일 와석면 시위가 임명애의 집에서 기획됐다. 그해 경성지방법원의 판결문에 따르면 임명애는 남편 염규호, 학생 김수덕, 농민 김선명과 함께 보안법 및 출판법 위반으로 징역형을 받는다. “임명애는 공립보통학교운동장에서 생도들을 선동하여 치안을 방해한 자(…) 격문을 배부해 자기 면민들과 조선독립운동을 하려고 꾀하여 이 날 소관 관청의 허가를 얻지 않고서 불온문서를 인쇄하여 반포함으로써 그 지방의 정일을 깬 자”라는 게 이유였다. 염규호 김수덕 김선명은 징역 1년형에 그쳤지만, 임명애는 징역 1년6월형을 받았다는 판결에서 일제가 그만큼 임명애를 위력적으로 봤음을 확인할 수 있다.

임명애가 투옥된 곳은 서대문형무소 8호방이다. 천안 아우내장터의 만세운동을 주도한 유관순과 어윤희 권애라 심명철 등 주요 여성 독립운동가들이 수형 생활을 하던 그 장소다. 수감 당시 만삭이었던 임명애는 복역한 지 한 달 만에 출산을 위해 임시 출소했다가 아이를 낳고 11월에 갓난아이와 함께 재수감됐다. 남편 염규호도 복역 중이었기에 가족이 모두 감방에서 생활하는 셈이 됐다. 이에 8호방의 여성 독립운동가들은 산모에게 밥을 나눠주고 기저귀를 말려주면서 함께 아기를 돌봤다. 1921년 4월 만기 출소하면서 임명애는 고향에 돌아왔고 1938년 세상을 떠났다. 그가 간절히 원하던 조선 독립은 그의 사후 7년 뒤 이뤄졌다.

파주=김지영 기자 kimj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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