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횡설수설/고미석]자기 부고, 자기가 쓰기

  • 동아일보
  • 입력 2013년 8월 15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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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동안 많은 총애를 받았사옵고 또 적지 아니한 폐를 끼쳤습니다. 감사합니다. 나는 오늘 먼저 갑니다. 여러분, 부디 안녕히 계십시오.’ 1974년 2월 8일자 동아일보에 색다른 부음 광고가 실렸다. 5일 전 향년 80세로 타계한 언론인 출신 진학문 씨가 미리 작성해 놓았던 자신의 부고였다. 동아일보 창간에 참여하고 전경련 부회장을 지낸 그는 장례를 치른 뒤 실어 달라며 생전에 하직 인사를 썼다.

▷‘안녕하세요. 아트 부크월드입니다. 제가 조금 전에 사망했습니다.’ 2007년 1월 18일 뉴욕타임스 인터넷판에는 전날 별세한 미국의 인기 칼럼니스트가 자신의 사망 소식을 전하는 동영상이 올라왔다. 사전에 육성으로 제작한 영상이었다. 이웃 나라 일본에서도 2011년 대지진 이후 자신의 부고나 유언을 미리 써놓는 사람들이 늘었다고 한다. 지난해 개봉한 일본의 다큐 영화 ‘엔딩 노트’는 딸이 죽음을 앞둔 아버지의 모습을 카메라로 기록한 작품이다. 위암 말기를 선고받은 아버지는 ‘죽음을 준비하는 것을 일생일대의 프로젝트’로 담담히 받아들였다.

▷지난달 28일자 미국 시애틀타임스의 유료 부고란에 여성작가 제인 로터가 쓴 자신의 부고가 실렸다. 61세의 나이로 타계한 그는 “나 자신의 부고를 쓸 수 있는 시간을 가질 수 있는 것이 암 투병의 장점”이란 농담으로 시작해 “나는 삶이라는 선물을 받았고, 이제 이 선물을 되돌려주려 한다”고 썼다. ‘계로록’의 저자 소노 아야코는 “재미있게 살았으니 어느 때 이승을 떠나도 괜찮다고 생각하는 것이 인생의 심리적 결재”라고 말한다. 생전에 자신의 부고를 쓰는 일은 결재 서류에 도장을 찍고 스스로를 성찰하는 행위가 될 것이다.

▷‘내면기행―선인들, 스스로 묘비명을 쓰다’라는 책에 따르면 옛사람들은 자신의 무덤에 묻거나 묘지 앞에 세울 비명을 미리 짓는 ‘자명(自銘)’을 통해 삶의 의미를 구하고자 했다. 자명이든 부고든 굳이 글로 쓰지 않아도 살아 있는 동안 죽음 앞에 설 자기 모습을 가끔씩 돌아볼 필요가 있다. 남은 날들을 보다 소중히 쓰겠다는 다짐이자, 아름답고 의미 있는 마무리를 위한 삶의 지혜가 아닐지.

고미석 논설위원 mskoh119@donga.com
#자기부고#글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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