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지털 흔적’[횡설수설/구자룡]

  • 동아일보
  • 입력 2020년 2월 20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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냉전시대 소련의 스탈린 체제 비판을 위해 조지 오웰이 1949년 출간한 ‘1984’에 등장하는 ‘빅브러더’는 시민을 24시간 감시하는 걸로 악명이 높다. 하지만 감시 수단만 보면 ‘텔레스크린’ 화면 앞에서 눈을 부릅뜨고 지켜보는 것이 고작이었다. 코로나19는 국가가 마음만 먹으면 신용카드와 휴대전화 등 정보화사회의 필수품들을 이용해 개인의 사생활을 24시간 낱낱이 파악할 수 있는 세상에 우리가 살고 있다는 사실을 일깨워준다.

▷‘어디 어디 다녔나?’ 지난달 20일 국내 첫 확진자가 나온 이후 시민들은 확진자나 밀접 접촉자들이 어디에 다녔는지 검색하는 것이 일상이 됐다. 확진을 받아 병원에 입원하기 전까지 길게는 보름 이상의 행적이 공개되고 언론에도 자세히 소개된다. 확진자들이 다녀간 지역이나 지점을 한눈에 볼 수 있는 사이트나 휴대전화 앱도 속속 등장하고 있다.

▷추가 감염 및 확산을 막기 위해 시급한 일이지만 확진자로서는 갑자기 프라이버시가 속속들이 공개되는 날벼락이 아닐 수 없다. 감염병은 치료받으면 낫지만 사생활 정보가 공개돼 입은 피해는 되돌리지 못할 수도 있다. ‘감염되거나 확진자와 접촉하면 나의 동선도 저렇게 낱낱이 공개되겠다’는 공포감을 가질 만하다.

▷16일 확진 판정을 받은 29번 환자(82)는 신용카드를 사용하지 않는 등 ‘디지털 흔적(Digital Footprint)’을 남기지 않아 이동 경로 추적이 힘들어 방역에 어려움을 더하고 있다고 한다. 하지만 대부분 시민은 대중교통 이용이나 식당 결제 등에 카드 사용이 보편화돼 일상 곳곳에서 ‘디지털 흔적’을 남기고 있다. 카드 추적에서 놓치는 행적은 스마트폰의 위성위치확인시스템(GPS)과 거리와 건물 등에 촘촘히 설치된 폐쇄회로(CC)TV로도 파악된다. 확진자 경로 파악에는 이 모든 수단이 동원되고 있다. 바이러스 피해자가 마치 범죄자 수준으로 행적이 파악되고, 정보가 방역이라는 공익을 위해 일반에 공개되어야 하는 현실이 안타까운 일이다.

▷앞으로는 개인정보를 담은 생체칩을 인체에 이식해 신분증 신용카드 전자키 등 다목적으로 사용될 수도 있다는 분석이 나오고 있다. 생체칩 이식을 거부하면 보험에 가입하지 못하는 등 사회생활을 할 수 없을 수도 있다고 전망하는 전문가도 있다. 변종 감염병의 습격이 빈번해지면 방역을 위한 ‘디지털 흔적’ 파악을 위해 생체칩이 필요하다는 소리까지 나오지나 않을지 우려된다. 바이러스로 인해 정보사회의 이기(利器)들이 감시에 사용돼 사생활을 까발리는 ‘빅브러더’로 변모하는 상황이 자주 오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구자룡 논설위원 bonhong@donga.com
#디지털 흔적#코로나19#개인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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