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수에서 女복싱대표로… 두려움 너머 날리는 희망 펀치

  • 동아일보
  • 입력 2020년 2월 7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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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 도쿄 올림픽 아시아 예선을 앞두고 충북 진천선수촌에서 훈련하고 있는 여자 복싱 대표팀 최고참 오연지(왼쪽)와 발라드 가수 출신 정주형. 둘은 한국 최초의 여자 복싱 올림픽 본선 진출을 위해 구슬땀을 흘리고 있다. 대한복싱협회 제공
2020 도쿄 올림픽 아시아 예선을 앞두고 충북 진천선수촌에서 훈련하고 있는 여자 복싱 대표팀 최고참 오연지(왼쪽)와 발라드 가수 출신 정주형. 둘은 한국 최초의 여자 복싱 올림픽 본선 진출을 위해 구슬땀을 흘리고 있다. 대한복싱협회 제공
이원홍 스포츠전문기자
이원홍 스포츠전문기자
반지하 단칸방에서 밤새워 노래를 불렀다. 대학에서 실용음악을 전공했고 졸업 후 가수로 데뷔해 음반도 냈다. 2016년 5월 ‘할 말이 있어’라는 노래를 발표했던 발라드 가수 주형.

그러나 그는 지금 여자 복싱 국가대표 정주형(29)이다. 정주형은 지난해 12월 21일 대한복싱협회가 주최한 2020 도쿄 올림픽 국가대표 선발 최종전 51kg급에서 기존 대표 선수들을 물리치고 우승했다. 한국 나이로 올해 서른. 선수로는 적지 않은 나이에 찾아온 운명의 급격한 전환이다.

가수 시절 오랫동안 히트곡이 없자 주변에서는 데리고 있으면 적자라는 말이 들려왔다. “수입은 불안정했고 생활은 어려웠다”고 했다. 소속사를 나왔고 작업실로 쓰던 방에서 먹고 잤다. 그곳에서 대학입시 준비생들에게 노래를 가르치며 살았다.

그곳에서 올려다 보이는 옆 건물에 복싱체육관이 있었다. 처음엔 그저 건강을 챙기고 샤워장을 이용하고 싶었을 뿐이라고 했다. 2017년 10월, 그는 복싱체육관에 들어섰다. 같은 체급에서는 압도적이랄 수 있는 169cm의 큰 키, 왼손잡이, 중학생 시절 태권도 선수로 활동했던 경험이 길러준 경쾌한 스텝. 관원들 중 두드러졌던 그는 주변의 권유로 생활체육 복싱대회에 나가기 시작했고 눈에 띄는 활약을 이어가자 선수로 뛰어보자는 제의를 받았다. 지난해 1월 서울 대성권투체육관 소속으로 정식 선수가 된 뒤 올해 초 서울시청으로 옮겼다.

하지만 인생의 진로를 바꾸는 것이 그리 쉬웠을까. “엄청 무섭고 너무 힘들었다”고 했다. 지금도 여전히 주먹이 무섭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엇이 그를 움직였을까. 그는 “지금 당장은 이것밖에 없다”는 생각이었다고 했다. 선수가 되어 소속팀이 생기면 고정적인 수입이 생길 거라는 데 생각이 미쳤고 “맘먹고 해보자”고 다짐했다. 지난해 5월, 운동 도중 오른 발목이 돌아갔다. “복싱은 스텝”이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발목은 중요하다. 하지만 그는 부어 오른 아픈 발목을 끌고 링에 올랐다. 그 발목으로 지난해 11월 예선을 1위로 통과했고 12월 최종 선발전에서 내로라하는 선수들을 물리치고 우승했다. “내가 감히 어떻게 국가대표가 됐을까 얼떨떨하다”고 했다.

이제 그는 당당한 국가대표 선수다. 다음 달 3일 요르단서 열리는 아시아 예선에서 6위 안에 들면 한국 여자 복싱 최초로 올림픽 본선에 나선다. 한국은 2012년 런던 올림픽에서 여자 복싱이 도입된 후 한 번도 본선에 진출한 적이 없다. 우연에 가까운 시작이었지만 역사에 기록될 순간이 다가오고 있다.

최희국 대한복싱협회 사무처장은 드라마틱하게 등장한 정주형에 대해 “무언가가 있다”고 했다. 그 ‘무언가’에 대해 묻자 “절실함이 아니겠느냐”고 했다.

스포츠 현장에서, 또 삶의 이런저런 길목에서 많이 들어온 얘기이기는 하지만 위기상황이 바로 비극적 결말로 이어지는 건 아니다. 정주형은 어려움을 자각한 정신이 어떻게 위력을 발휘하는지 보여준 또 하나의 사례다.

하지만 그것뿐일까. 이번 올림픽을 절실하게 기다려온 선수 중 한 명이 복싱 여자대표팀 최고참 오연지(30·울산광역시청·60kg 이하급)다. 한국 최강자지만 지난 두 번의 올림픽 출전 기회를 놓쳤다. 그는 “올림픽은 하늘이 정해 주는 거 같다”고 했다.

일반인들에게도 마찬가지겠지만 선수들을 크게 괴롭히는 것 중 하나가 어떤 일이 닥칠지 모르는 불확실성이다. 여기서 오는 막연한 불안감은 때로 공포가 되고 몸을 굳게 만드는 사슬이 된다. 선수들은 이것과도 싸우고 있다.

정주형은 “1라운드에 대한 공포가 있다”고 했다. 시작에 대한 두려움이다. 그러나 일단 부딪치면 두려움은 점차 사라져 간다고 했다. 오연지는 “너무 간절해지면 부담이 된다”고 했다. 시작 전의 불안, 이에 대한 마음의 준비가 필요하다는 점에서는 공통적이었다.

절실함과 더불어 용기가 필요하다는 말이었다. 이들의 얘기를 듣다 보면 경기 결과로만 뭔가를 평가할 수는 없다는 생각이 든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 자신의 안팎과 용기 있게 맞서 온 그들은 이미 영웅이다.
 
이원홍 스포츠전문기자 bluesky@donga.com
#여자복싱#정주형#오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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