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권 따라 말 바꾸는 그들… 살아 있는 권력은 길지않다[광화문에서/이정은]

  • 동아일보
  • 입력 2019년 10월 14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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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은 워싱턴 특파원
이정은 워싱턴 특파원
대선을 거치면서 보수에서 진보 정권으로, 또는 반대의 경우로 바뀐 뒤 말이 180도 달라지는 공직자들을 보면서 어이없다고 느낀 일이 적지 않았다. ‘영혼이 없는 공무원’이라는 게 이런 것이냐며 혀를 차는 기자에게 친한 공무원은 “영혼이 없는 게 아니라 영혼이 여러 개 있어서 갈아 끼운다”고 했다. 공무원도 영혼이 있다는 것을 강조하는 농담 섞인 자조였지만 ‘갈아 끼우는 영혼’이라는 한마디가 씁쓸한 여운을 남겼다.

요즘 미국에도 이 말이 딱 들어맞는 공직자들이 수두룩해져서 놀라게 된다.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에 대한 하원의 탄핵조사가 본격화하면서 정치적 궁지에 몰린 그를 방어하기 위해 전선에 내몰린 참모진의 발언과 태도가 달라졌다. 말 바꾸기와 거짓말, 절차 무시, 조사 불응, 책임 떠넘기기 등 행태가 연일 언론을 통해 드러나고 있다.

마이크 폼페이오 국무장관은 ‘우크라이나 스캔들’을 촉발시킨 트럼프 대통령과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 간 통화 당시 그 자리에 배석했다. 그런데도 언론 인터뷰에서 통화 내용을 잘 모른다는 식으로 피해갔다. 통화 관련 자료를 제출하라는 하원의 요구에는 2차례 연속 불응했다. 백악관의 부당한 지시에 따르지 않은 후배 외교관이 전격 경질된 것에 대해서는 침묵했다. NPR방송은 그가 규율이 엄격한 웨스트포인트(육군사관학교) 출신이라는 점을 거론하며 “사관생도는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고 했던 웨스트포인트의 선서는 어디로 갔느냐”고 지적했다.

윌리엄 바 법무장관은 아예 트럼프 대통령의 ‘개인 변호사’라는 비아냥거림을 듣고 있다. 미국의 사법질서와 정의를 세우는 일은 제쳐놓고 트럼프 대통령의 탄핵 방어에 골몰하고 있다. 최근 트럼프 대통령을 정치적 궁지로 몰았던 ‘러시아 스캔들’이 조작됐다는 음모론을 입증하기 위해 직접 이탈리아로 출장을 가기도 했다.

현직은 아니지만 뉴욕시장 출신인 루돌프 줄리아니의 행보는 수많은 풍자와 패러디를 낳고 있다. 트럼프 대통령의 개인 변호사로 ‘우크라이나 스캔들’에 깊숙이 관여된 그는 연일 방송 인터뷰에 출연해 궤변 수준의 항변을 이어가고 있다. 대대적인 경찰 개혁과 성공적 도시개발 신화를 쓰고 9·11테러 당시 리더십을 발휘하며 ‘미국의 시장’으로 추앙받던 명성은 온데간데없다. 그와 뉴욕시장 선거 캠페인을 함께 뛰었던 옛 참모가 최근 뉴욕타임스에 ‘줄리아니에게 도대체 무슨 일이?’라는 제목의 기고문을 실었을 정도다.

하원은 마이크 펜스 부통령 및 이번 사건과 관련된 부처 수장들에게 줄줄이 소환장을 발송하며 강도 높은 조사를 벼르고 있다. 백악관이 “조사에 협조하지 않겠다”고 선언하면서 ‘강 대 강’ 정면충돌이 불가피해졌다. 미 헌법과 민주주의 위기 앞에 공직자들의 처신도 유례없는 시험대에 오른 셈이다.

상식과 체면을 벗어던지는 미 공직자들의 변신은 트럼프 대통령의 ‘살아 있는 권력’에 기대고 있다. 그러나 탄핵에 찬성하는 여론이 50%를 넘어서고, 공화당 내에서도 비판과 우려의 목소리가 커지면서 트럼프 대통령의 재선 캠페인에도 경고등이 켜졌다. 평생 쌓아온 평판과 양심을 걸기에 권력은 너무도 짧고 유한하다.

이정은 워싱턴 특파원 lightee@donga.com
#마이크 폼페이오#우크라 스캔들#트럼프 대통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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