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도 남들처럼” 월드컵 영웅들의 항명[오늘과 내일/박용]

  • 동아일보
  • 입력 2019년 7월 13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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女 월드컵 4번 우승해도 차별 대우… ‘공정 보상’은 ‘투자 차별’ 해소부터

박용 뉴욕 특파원
박용 뉴욕 특파원
1992년 히트 드라마인 ‘아들과 딸’은 쌍둥이 남매 ‘귀남(貴男)’과 ‘후남(後男)’의 성장 이야기다. 7대 독자 아들은 이름부터 ‘귀한 남자’다. 같은 날 태어난 쌍둥이 딸은 ‘다음엔 아들을 낳아야 한다’고 다짐하게 만드는 존재다. 후남이는 귀남에게 다 걸기를 한 부모 탓에 대학 진학 기회조차 포기해야 했다. 당시 시청률이 60%를 넘었던 것을 보면 ‘후남이’ 이야기는 드라마에나 있는 이야기는 아니라고 봐야 한다.

가족의 투자에서 소외되고 실력으로 자신을 증명하기 위해 악바리처럼 살아가는 ‘나도 후남이’들의 사연은 2020년을 앞둔 지금도 나온다. 양성 평등 문화가 우리보다 훨씬 앞선 미국에서도 여자들은 투자 가치가 낮은 ‘2등 시민’ 대접을 받고 있다고 울분을 터뜨린다. 7일(현지 시간) 막을 내린 프랑스 여자 월드컵에서 2회 연속 우승컵을 들어 올린 미국 여자 축구대표팀은 3월 미국 축구협회를 상대로 성 차별에 항의하는 소송을 냈다.

영국 가디언에 따르면 미국축구협회는 여자 대표팀이 월드컵을 우승하면 20만 달러(약 2억4000만 원)의 보상금을 준다. 남성은 110만 달러(약 13억 원)로 5배가 넘는다. 올해 여자 월드컵 총상금은 3000만 달러(약 353억7000만 원)다. 2018년 남자 월드컵 총상금의 7.5%다. 미 축구협회는 여자 경기 수익이 적고 시청률도 낮아 보상이 적다고 주장하지만, 미 언론은 협회 재무보고서를 인용해 여자팀이 2015년 월드컵 우승 후 3년간 남자팀보다 더 많은 수익을 올렸다고 전했다. 티셔츠도 여자팀 게 더 많이 팔렸다. 이번 여자 월드컵 결승전의 미국 시청률은 2018년 남자 월드컵 결승전 때보다 높았다.

미 여자 대표팀이 스포츠 시장의 생리는 모르고 돈만 밝힌다고 비판하는 이들도 있다. 그들이 요구한 건 돈이 전부가 아니었다. 월드컵에서 우승을 해도 보상은 물론 연습시설, 여행 계약, 의료 지원 등 투자에서 차별 대우를 받았다는 게 여자 선수들의 불만이다. 여자 대표팀 주장 메건 러피노는 “‘공정한 보상(Equal pay)’은 급여 이상이다. 남녀 모두에게 동등한 투자와 지원, 배려와 지적 능력을 부여하기 전까지 우리의 잠재력이 무엇인지 알지 못한다”고 말했다.

월스트리트저널(WSJ)은 미 대학이 운동선수 장학금을 남녀 동수에게 제공하도록 만든 1972년 민권법을 미국 여자 축구 성공 비결로 꼽았다. 소수 엘리트 중심의 유럽과 달리 미국에서는 이 법에 따라 많은 여학생들이 스포츠 활동에 참가하면서 우수 선수들이 자연스럽게 발굴됐다는 것이다. 실제로 맨해튼 도심이나 캘리포니아주 작은 마을에서도 축구공을 든 여학생을 보는 게 어렵지 않다.

여성들이 승진과 보상의 ‘유리 천장’을 깨고 나오려면 투자와 기회에서 여성을 소외시키는 ‘후남이의 굴레’부터 풀어야 한다. 성과에 대한 정당한 보상이라는 결과만 놓고 얘기하는 건 한계가 있다. 스포츠뿐이 아니다. 여성들이 임원급 간부로 성장할 수 있도록 리더십 교육에 대한 투자를 얼마나 하고 있는지, 미래 일자리 시장에서 각광받는 인재인 ‘과학·기술·공학·수학(STEM)’ 분야의 여성 인재 육성을 위해 우리는 얼마나 투자를 하고 있는지부터 따져보고 바꿔야 한다.

미 여자 축구대표팀은 10일 오전 뉴욕 맨해튼 남단 볼링그린에서 시티홀파크로 이어지는 브로드웨이 ‘영웅들의 협곡’을 트로피를 들고 행진했다. 영웅들을 마중 나온 뉴욕 시민들은 “공정한 보상”, “그들에게 보상하라(Pay them)”고 외쳤다. 그들은 4년 전에도 군중의 환호 속에서 트로피를 들고 이 협곡의 주인공이 됐다. 현실은 그들을 진정한 영웅으로 대하지 않았다. 다음 4년, 다다음 4년은 아마 다를 것이다.
 
박용 뉴욕 특파원 parky@donga.com
#여자 월드컵#유리 천장#임금 차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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