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구남이도 사람답게 살 권리가 있다[권용득의 사는게 코미디]

  • 동아일보
  • 입력 2019년 7월 9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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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용득 만화가 그림
권용득 만화가 그림
권용득 만화가
권용득 만화가
돈 되면 무슨 일이든 한다. 들어오는 일의 종류나 성격을 가리지 않는다. 비수기에 백수나 다름없는 나 같은 프리랜서에게는 그것만이 유일한 살길이다.

그런데 어떤 일은 하다 보면 진이 쏙 빠진다. 시중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청소년 교양도서 시리즈물을 예로 들자. 출판사는 해당 시리즈물의 편집과 디자인을 외주로 돌린다. 외주를 맡은 쪽은 해당 시리즈물에 어울릴 만한 만화가 또는 삽화가를 섭외한다. 제조업으로 치면 그와 같은 방식으로 고용된 나는 원청업체의 하청업체를 통해 계약 맺은 재하청업체인 셈이다. 그래도 계약서상으로는 재하청업체인 내가 ‘갑’이다. 야호!

이때 재하청업체는 아무 생각 없이 하청업체의 요구를 순순히 따르기만 하면 서로 행복할 수 있다. 만일 ‘이건 좀 아닌데’라며 의문을 품으면 갈등만 초래한다. 재하청업체 주제에 자기만의 색깔을 고집하거나 수정 요구가 지나치다며 볼멘소리를 참지 못하면 그건 곧 ‘갑질’이 되고 만다. 그럴 때마다 차라리 내가 기계였으면 좋겠다. 어차피 내가 만든 결과물은 원청업체가 기획한 상품을 돋보이기 위한 수단에 불과하니 말이다.

이런 식의 외주화는 무한경쟁 시대에 불가피한 선택일 수 있다. 무엇보다 효율적이다. 원청업체는 직접고용으로 발생하는 비용을 최대한 아낄 수 있다. 결과물이 못마땅하면 하청업체를 조지면 된다. 굳이 피곤하게 재하청업체까지 상대하지 않아도 된다.

그렇게 만든 상품을 고객님은 마음의 양식이라며 청소년 자녀에게 사준다. 원청업체는 상품이 많이 팔릴수록 이익이 커진다. 대개 매절계약이므로 원청업체는 하청업체와 재하청업체에는 그 이익을 나눠줄 필요 없다. 무한경쟁 시대에 일단 나부터 살아남아야 하니까! 나머지는 알아서 살아남든지 말든지!

그래서일까. 영화 ‘황해’의 김구남(하정우)이 겪는 수난이 도무지 남 일 같지 않다. ‘구남이’와 면정학(김윤석)은 재하청업체와 하청업체 관계다. 원청업체는 따로 있다. 구남이는 면정학으로부터 외주 받은 살인을 실패한다. 제3자가 고용한 하청업체와 재하청업체가 끼어드는 바람에 누명을 쓰고 쫓기는 신세가 된다. 종국에는 완전범죄를 꿈꾸며 자신의 손은 더럽히지 않으려던 원청업체 덕분에 모두 파국을 맞는다.

마침 공공분야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파업 중이다. 그들은 왜 파업했을까. 자신의 손은 더럽히지 않으려는 우리 사회가 그들을 매번 구남이처럼 적당히 쓰다 버리기 때문 아닐까. 나는 그게 딱히 비인간적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다만 완전범죄를 꿈꾼다면 그만큼 비용을 더 감수하든지, 아니면 한 배를 탄 운명공동체인 이 시대 모든 구남이의 안전까지 보장했으면 한다.

참, 앞에서 돈 되면 무슨 일이든 한다고 했다. 하지만 청부살인과 댓글 알바는 돈을 아무리 많이 준다고 해도 일없다. 아직 그 정도로 절박하지 않다.
 
권용득 만화가
#하청업체#외주#황해#김구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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