옆집의 탈북 가족은 안녕하신가요?[오늘과 내일/신석호]

  • 동아일보
  • 입력 2019년 8월 16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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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와 시장에서 소외된 탈북 이웃 없나 돌아봐야

신석호 디지털뉴스팀장
신석호 디지털뉴스팀장
“기자 학생 양반. 거저 내 한글 쓰기 공부 좀 도와 주시라우. 나만 알고 있는 북한 정보를 조선말(북한말)로 써 드릴 테니 특종으로 내시고 대신 여기(서울 표준말) 표현으로 좀 고쳐 주면 서로 도움이 되지 않겠습네까?”

2000년대 초 북한학 석사과정에서 동문수학하던 한 탈북자 학생 A(당시 40대 남성)가 ‘따끈한 북한 정보’와 ‘현직 기자의 글쓰기 코칭’을 서로 맞교환하자며 이렇게 제안했다.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든든한 북한 출신 정보원을 두게 된 셈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글을 받아 보고 기대가 실망으로 변했다. 기사로 쓸 만한 새로운 정보는 없었던 반면, ‘조선말’을 고치는 데는 상당한 노력과 시간이 걸렸다. 첫 번째는 봉사한다는 마음으로 임했지만 거래는 오래가지 않았다. 그가 나에게 줄 것은 별로 없었고 생업과 가사, 학업의 3중고는 나에게 계속 자선을 베풀 여유를 주지 않았다.

A가 느꼈을 막막함을 10여 년 뒤 미국 워싱턴 특파원 부임 초기 간접적이나마 체험할 수 있었다. 어려운 일을 말 한마디에 도와주던 지인들이 곁에 없는 조건에서 새로운 환경에 적응해야 하는 막막함이란? 사회학자들이 말하는 ‘존재론적 안정감’이 저하된 상태는 정착 초기 탈북자들이 훨씬 심했을 것이라는 공감이 밀려왔다.

탈북자들이 한국 생활에 적응해 가는 과정에는 불편한 진실도 있다. 자유를 찾아 고향을 버린 그들을 굳이 구분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지만 대체로 더 잘 정착하는 이들은 북한에서도 권력과 경제력을 누리던 부류다. 노동당 간부 부모를 만나 평양소년학생궁전에서 예술과 스포츠를 배운 이들은 한국에서도 예술가와 체육인으로 잘나갈 수 있다. 변방에서 굶주리던 보통 사람의 자제들은 한국에서도 하층민 신세다.

노벨경제학상 수상자인 인도의 아마르티아 센은 ‘왜 세상은 불평등하고 사람이 굶어 죽느냐’는 질문에 평생을 바쳤다. 1940년대 인도의 대량 아사(餓死·굶어 죽음) 사태를 연구한 그는 그저 ‘먹을 것이 부족해 굶어 죽는다’는 기존 경제학 통념을 깨는 결론에 이른다. 국가적으로 먹을 것이 충분한 상황에서도 정치 경제적 불평등 때문에 일하고 식량을 얻을 권리(entitlement)를 박탈당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적게는 수십만에서 많게는 수백만 명이 굶어 죽은 것으로 추정되는 1990년대 초중반 북한 경제위기 ‘고난의 행군’도 대표적인 경우다. 소련을 비롯한 동유럽 사회주의 나라들이 자본주의로 체제 전환을 하면서 달러와 에너지, 식량난에 처한 당시 북한의 변방에는 국가의 배급이 끊어졌다. 시장에서 돈을 벌 능력도 없는 말단 하급 공무원들은 김일성과 김정일 초상화만 쳐다보다 굶어 죽었다. 경제 실정의 책임이 있는 공산당 간부들은 고기를 구워 먹다 남아서 버렸다는 증언들이 있다.

센도 북한 경제난과 기아에 관심을 가졌다. 하지만 자유와 풍요를 찾아 고향을 버리고 남한행을 택했다 관악구 임대아파트에서 굶어 죽은 한모 씨(42·여)와 아들 김모 군(6)의 죽음에 대해서는 뭐라 할지 궁금하다. 분명한 것은 한 씨 모자가 센이 말한 ‘생존을 위한 인타이틀먼트’에서 배제되어 있었다는 것이다.

지금 한국이 고난의 행군 시절 같은 경제위기에 빠진 것도 아니고, 드물게 나오는 아사자들이 북에서 온 사람만은 아니다. 하지만 태영호 전 영국 주재 북한대사관 공사의 지적처럼 평양은 이 사건을 내부 선전에 적극 활용할 것이 분명하다. 센은 ‘풍요 속의 아사’라는 비극을 최소화하기 위해 개개인의 역량(capability)을 키우는 사회적 배려가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그도 이번 사건이 국가에 기대서도, 시장을 통해서도 먹고살 길이 막막한 탈북자들이 없는지 주변을 돌아보는 계기가 되어야 한다고 충고할 것이다.

신석호 디지털뉴스팀장 kyle@donga.com
#탈북자#풍요 속의 아사#고난의 행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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