任 “협상” vs 玄 “원칙”… 엇갈린 대북라인, 남북관계도 꼬였다

  • 동아일보
  • 입력 2010년 8월 3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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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년 남북정상회담 추진 과정 진실은

지난해 8월 이후 북한과의 정상회담 개최 논의 과정에서 협상파 역할을 맡았던 임태희 대통령실장(왼쪽)과 대북 원칙파 입장을 고수했던 현인택 통일부 장관(오른쪽). 동아일보 자료 사진
지난해 8월 이후 북한과의 정상회담 개최 논의 과정에서 협상파 역할을 맡았던 임태희 대통령실장(왼쪽)과 대북 원칙파 입장을 고수했던 현인택 통일부 장관(오른쪽). 동아일보 자료 사진
《지난해 8월 북한 조문단이 김대중 전 대통령의 빈소에 나타나면서 남북 간 정상회담 논의가 시작된 지 1년이 흘렀다. 2일 동아일보 취재 결과 지난 1년간 정부 내에서는 북한과의 대화를 둘러싼 논란과 물밑 힘겨루기가 계속됐던 것으로 확인됐다. 임태희 당시 노동부 장관(현 대통령실장) 비선 라인으로 상징되는 대북 ‘협상파’와 현인택 통일부 장관으로 대표되는 대북 ‘원칙파’의 대결이 그것이다.》

복수의 소식통은 김기남 노동당 비서와 김양건 통일전선부장 등이 지난해 8월 23일 청와대를 방문해 이명박 대통령을 접견했을 무렵 북한 문제를 다루는 외교안보라인 당국자들의 입장은 두 갈래로 극명하게 엇갈렸다고 전했다.

한 당국자는 당시 “한반도의 안정적인 관리를 위해 북한을 테이블에 앉혀 놓고 변화시켜야 한다”며 ‘전략적 관여(strategic engagement)’를 실천할 수 있는 기회라고 주장했다. 반면 다른 당국자는 “두 차례나 핵실험을 하고 3대 세습을 추진하는 북한과 대화해서 우리가 얻을 것이 없다”며 “북한과 섣불리 대화할 경우 정권의 위기를 자초할 수 있다”고 반박했다.

기선을 잡은 것은 협상파였다. 당시 임 장관은 이미 정권 출범 초기부터 한나라당 당직자와 대북 전문가 그룹으로 대북 비선라인을 가동하고 있었다. 2009년 여름 당시 정부는 그해 3월 북한에 억류된 개성공단 근로자 유성진 씨를 석방시켜야 하는 등 남북 현안을 풀어야 하는 다급한 상황이었다. 이명박 대통령은 임 장관의 비선이 북한과 접촉할 것을 승인했다.

연내 정상회담 개최를 통해 경제 지원을 받아내려는 북측과 이를 조건으로 남북 간 현안을 풀고자 했던 임 장관의 비선라인의 활동으로 남북문제는 일사천리로 풀리는 듯했다. 임 장관은 조문단의 방한에 역할을 했고 이후 산적한 현안을 하나하나 풀어 나갔다. 당시 정부 안팎에서는 조문단 방문 이후 남북 현안들이 속속 해결되자 “보이지 않는 손이 있다”는 얘기가 나왔다. 바로 임태희 비선라인이었다.

그러나 북한이 10월 싱가포르 비밀회담에서 연내 정상회담 개최를 조건으로 대북 경제지원을 요구하면서 문제가 꼬이기 시작했다. 이명박 정부는 출범 이후 북한과 대화를 하는 대가로 경제적 지원을 하지 않을 것임을 강조해 왔다. 임 장관이 주저하자 김양건 부장은 “사인을 받아가지 못하면 내가 죽는다”고 위협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그것이 마지막이었다. 임 장관의 싱가포르행이 언론에 알려지면서 비선라인의 활동은 중단됐다. 임 장관의 독주에 불만을 품은 정부 쪽에서 언론에 정보를 흘린 것이 아니냐는 관측도 나왔다.

이후 원칙파의 무대가 왔다. 현인택 장관은 비선 합의만을 근거로 정상회담을 발표할 수는 없으며 정부 간 공식 라인의 합의가 있어야 한다고 이 대통령을 설득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 대통령은 공을 세운 임 실장을 배제하고 이번에는 통일부와 국가정보원 등으로 구성된 정부협상단에 추가 협상을 지시했다.

11월 7일 개성에서 열린 남북 당국 간 비밀접촉에서 남북은 1시간 동안 각자의 주장을 일방적으로 늘어놓은 것으로 알려졌다. 정부 협상단은 ‘원칙’을 강조하며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서울 답방 요구 등을 조건으로 내세웠다. 이에 북측도 “왜 말을 바꾸느냐”고 버텼고 경제지원을 이면합의하거나 6·15 및 10·4선언 이행을 공개적으로 약속할 것을 요구했다.

11월 10일 양측 협상팀이 예상치 못했던 대청해전이 발발했고 11월 14일 다시 만난 양측은 “더 할 말이 있느냐. 나는 할 말이 없다”는 통보만 남기고 회담장을 나갔다.

회담이 결렬되자 곳곳에서 파열음이 터져 나왔다. 정부 내 협상파는 “관료들이 공을 세우려고 욕심을 내다가 우리가 다 해놓은 밥을 엎질렀다”고 공공연하게 비난했다. 반면 원칙파는 “북한을 잘 모르는 비선이 합의한 대로 정상회담을 했으면 북한에 이용만 당하고 정권 지지층이 이반됐을 것”이라며 “그 정도로 막은 것만 해도 다행”이라고 반박했다.

북한은 현 장관 등 정부 관료들이 이 대통령을 막고 있다고 생각한 듯 지난해 12월 여권 중진인사 A 씨 등을 통해 “임태희 비선라인과 합의한 내용을 다시 논의하자”고 전달해 왔다. 청와대 당국자는 그 같은 내용을 전한 동아일보 보도(2일자 A1·3면 참조)에 대해 2일 “우리 정부와는 무관한 일”이라고 말해 정부가 당분간 비선을 통한 북한과의 대화에 나서지 않을 방침을 내비쳤다.

일각에서는 지난해 협상에 대한 이 대통령의 태도에도 문제가 있었다는 지적이 나온다. 비선라인을 통해 얻을 것을 다 얻은 뒤 일방적으로 협상대표를 바꾸고 조건을 높인 것은 협상의 원칙에 맞지 않는다는 것이다. 당시 김양건 부장은 “한국에서 대기업이 중소기업 다루듯이 우리를 다루느냐”며 역정을 낸 것으로 알려졌다.

한 전문가는 “북한은 대하기 어려운 특별한 상대이고 보통의 다른 나라와 외교를 하듯 북한을 다루면 안 된다”며 “이 대통령이 처음부터 북한을 너무 쉽게 생각한 것 같다”고 지적했다.

신석호 기자 kyle@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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