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정생존자[횡설수설/김영식]

  • 동아일보
  • 입력 2020년 4월 8일 03시 00분


코멘트
1981년 3월 로널드 레이건 당시 미국 대통령이 존 힝클리의 총탄에 쓰러져 수술실로 옮겨졌다. 그 시각 헌법상 대통령 승계 1순위인 조지 부시 부통령은 텍사스 상공을 날고 있었다. 몇 시간 동안 대통령 유고사태가 벌어진 셈이다. 이때 알렉산더 헤이그 국무장관이 백악관 기자실을 찾아 “지금부터 백악관은 내가 통제한다”고 말했다. 권력승계 서열을 무시한 초헌법적 과욕을 부린 것이다. 레이건은 복귀 후 그를 해임하고 조지 슐츠를 국무장관에 임명했다.

▷국가수반의 건강은 정책 결정과 외교 협상에 영향을 미칠 정도로 중요한 안보 사안이다. 그래서 대부분의 국가는 대통령이나 총리의 사망 또는 탄핵에 따른 유고 상황에 대비한 권력승계 서열을 정해 둔다. 미국의 권력승계 서열은 부통령 겸 상원의장, 하원의장, 상원 임시의장, 국무장관 등의 순서다. 미국 건국 이래 대통령 8명이 임기 중 사망하고, 리처드 닉슨 전 대통령이 하야해 9번의 유고가 발생했는데 모두 부통령이 이어받았다.

▷한국에선 1960년 이승만 전 대통령 사임을 시작으로 박근혜 전 대통령 탄핵까지 5차례의 권한대행 체제가 있었다. 권력승계 서열은 국무총리, 기획재정부 장관, 교육부 장관, 과학기술정보통신부 장관, 외교부 장관 등의 순이다.

▷미국은 ‘지정생존자’ 제도도 두고 있다. 어떤 순간에도 국정에 공백이 없어야 한다는 취지다. 대통령 취임식이나 국정연설 등 정부와 의회, 사법부의 고위직이 한꺼번에 참가하는 공식 행사에서 테러나 핵공격 등 불상사가 벌어지는 상황에 대비한 것이다. 대통령 권한을 대행할 ‘지정생존자’ 1명을 지정해 워싱턴 외곽에 대기시키곤 한다. 올해 2월 미 대통령 연두교서 발표 때에는 데이비드 번하트 내무장관이 지정생존자로 지목됐다. 존재감이 크지 않은 부처 수장들이 주로 맡는데 행사 때마다 백악관 비서실장이 지정한다.

▷코로나19에 감염돼 상태가 악화된 보리스 존슨 영국 총리가 어제 중환자실로 옮겨졌다. 존슨 총리는 의식이 있는 상태에서 선임장관인 도미닉 라브 외교장관에게 총리 권한대행을 맡겼다. 성문 헌법이 없는 영국에는 왕위계승법에 따른 왕실 승계서열은 있지만 내각의 승계서열은 명문화된 게 없다. 존슨 총리가 중환자실에 있는 동안 라브 장관이 총리 권한을 행사한다. 하지만 보건부 장관 등 다른 각료와 차관 가운에서도 확진 판정자가 나오고 있다. 라브 장관을 비롯해 다른 각료들로까지 감염이 번지는 최악의 시나리오에 대비해 ‘지정생존자’를 둬야 하는 것 아니냐는 걱정까지 나온다. 유례없는 감염력을 지닌 별종 바이러스에 영국 권력의 최상층부까지 흔들리고 있다.
 
김영식 논설위원 spear@donga.com
#지정생존자#국정 공백#보리스 존슨#코로나19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댓글 0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