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에 휘청이는 중동… 주력산업-성장동력 올스톱

  • 동아일보
  • 입력 2020년 3월 26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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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로벌 현장을 가다]
양대 주력 관광-에너지 모두 타격
재정부담 증가, 산업다각화도 차질
오일머니로 억누른 민심 폭발 직전… 장기화땐 정국 불안 확산 가능성

이집트의 대표 관광지인 카이로 ‘기자 피라미드‘가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확산 우려로 폐쇄됐다. 이집트 정부는 경제적 피해에도 불구하고 코로나19 확산을 막기 위해 피라미드 등 주요 관광시설의 운영을 당분간 중지하기로 했다. 국제선 운항도 다음 달 중순까지 금지된다. 카이로=이세형 특파원 turtle@donga.com
이집트의 대표 관광지인 카이로 ‘기자 피라미드‘가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확산 우려로 폐쇄됐다. 이집트 정부는 경제적 피해에도 불구하고 코로나19 확산을 막기 위해 피라미드 등 주요 관광시설의 운영을 당분간 중지하기로 했다. 국제선 운항도 다음 달 중순까지 금지된다. 카이로=이세형 특파원 turtle@donga.com
이세형 카이로 특파원
이세형 카이로 특파원
24일(현지 시간) 이집트 수도 카이로 도심에서 차로 약 20분 거리에 있는 ‘기자 피라미드’를 찾았다. 세계 각국에서 몰려드는 관광객으로 늘 붐비던 이곳에서는 관광객을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마스크를 한 채 입구를 지키는 경찰관 몇 명만 있었다.

평소 대형 관광버스로 가득하던 주변 도로 역시 한산했다. 기념품을 파는 상인, 낙타 타기를 권유하는 현지인들의 호객 행위도 없었다. 동행한 이집트인 지인은 “피라미드 앞이 이렇게 한산한 모습은 태어나서 처음 본다”고 했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사태로 이집트의 핵심 수입원인 관광업이 사실상 마비 상태에 빠졌다. 정부는 이달 21일부터 기자 피라미드, 국립박물관 같은 대표 관광지를 이달 말까지 폐쇄했다. 국제선 항공편 운항 역시 다음 달 15일까지 중단하고 야간통행 제한도 실시한다. 현지에서는 ‘느리고 비효율적인 행정으로 유명한 이집트 정부가 이렇게 빠르게 움직이다니 놀랍다. 그만큼 코로나19 확산이 두려운 듯하다’란 평이 나온다.

○ 중동 관광대국 속속 셧다운

매년 이집트를 찾는 해외 관광객은 약 1500만 명. 이들이 쓰는 약 125억 달러(약 15조6250억 원)의 돈이 국내총생산(GDP)의 11%, 외화 수입의 14.4%를 차지한다. 또 1억 인구의 약 15%인 1470만 명이 관광업에 종사하므로 고용에 끼치는 영향도 상당하다. 사실상 관광객이 뿌리는 돈이 나라의 핵심 외화 수입원이다.

이집트는 중동에서는 드물게 석유 및 천연가스 자원이 풍족하지 않다. 그런데도 막대한 경제적 손실을 무릅쓰고 ‘관광업 셧다운’에 나선 이유는 지금 사태를 제대로 관리하지 못하면 관광산업 자체가 붕괴될 수 있다는 걱정 때문이다.

24일 기준 이집트의 감염자는 402명. 특히 정부는 이달 초 외국인 관광객들이 주로 이용하는 나일강 크루즈선에서 45명의 집단 감염자가 발생했다는 점을 우려하고 있다. 이를 계기로 본격적으로 감염자가 늘었고 관광대국 이미지에도 상당한 금이 갔다.

당시 이집트는 다른 크루즈선 탑승객을 상대로 선별 검사를 했다. 보건의료 인프라가 열악한 이집트에서 사전 검사가 이뤄졌다는 것 자체가 정부의 위기의식을 보여준다는 평가다. 이권형 대외경제정책연구원 연구위원(중동경제)은 “이집트는 2011년 ‘아랍의 봄’ 민주화 시위, 2014년 이슬람국가(IS) 준동 등으로 관광업이 침체됐을 때 경제적 타격이 얼마나 심한지를 뼈저리게 겪었다. 이를 잘 알기에 선제적 예방 조치에 나섰다”고 진단했다.

이집트 못지않게 관광업 비중이 큰 모로코, 튀니지 역시 국제선 운항 중단, 통행 제한 등을 실시했다. 이슬람 종주국 사우디아라비아는 양대 성지인 메카, 메디나의 순례를 금지했다. 세계 12억 명의 이슬람 신자가 평생 한 번 꼭 찾는 이곳의 문을 닫는 초강수를 둔 셈이다.

○ 탈(脫)석유와 산업 다각화 차질


코로나19는 사우디, 아랍에미리트(UAE), 카타르 등 중동 산유국 경제에도 심각한 타격을 주고 있다. 특히 이들이 야심 차게 진행하던 탈석유 및 산업 다각화 전략에 차질이 상당하다.

UAE는 양대 항공사인 에티하드항공과 에미레이트항공이 심각한 경영난에 빠져 울상이다. 각각 아부다비, 두바이를 거점으로 둔 두 항공사는 아시아와 유럽을 연결하는 지정학적 요충지, 오일머니 등을 바탕으로 가격 대비 높은 서비스를 제공하며 각국 항공 수요를 끌어들였다.

로이터통신 등에 따르면 현재 두 항공사는 대규모 구조조정의 전(前) 단계에 돌입했다. 에미레이트항공은 조종사 4000명과 승무원 2만1000명을 대상으로 무급 휴가를 시행하고 있다. 신규 채용도 당분간 진행하지 않는다. 에티하드항공은 최고 50%까지 임금을 줄이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다. 아부다비에 비해 오일머니가 부족한 두바이의 상황을 감안할 때 사태가 계속되면 에미레이트항공의 구조조정 폭이 클 것이라는 전망이 나온다.

사우디 역시 관광 및 문화콘텐츠 산업이 흔들리고 있다. 사우디는 이달 19일부터 열릴 예정이던 유럽여자프로골프투어(LET) 대회를 취소했다. 11월 수도 리야드에서 열리는 주요 20개국(G20) 정상회의 관련 행사도 축소될 가능성이 높다.

중동 최초로 2022년 월드컵을 유치한 카타르에서는 해외노동자 거주시설에서 코로나19 집단감염 사태가 발생했다. 이로 인해 월드컵, 산업 다각화 관련 대형 건설사업이 상당한 차질을 빚고 있다. 카타르 인구 260만 명 중 카타르 국적자는 약 30만 명. 나머지 230만 명은 대부분 인도, 파키스탄, 방글라데시 등에서 온 노동자들이다. 국가 경제가 해외 노동자의 일손에 의존하고 있고 자국민 수가 워낙 적어 대안을 마련하기 쉽지 않다.

○ 정정 불안 고조

코로나19 사태와 이에 따른 유가 하락은 중동 전체의 정정 불안을 고조시키고 있다. 중동은 대부분 전제왕정 및 독재 체제다. 그동안 오일머니로 국민 불만과 반발을 간신히 억눌러 왔지만 코로나19 사태가 장기화하면 한계에 부닥칠 가능성이 높다는 지적이 나온다.

세계 최대 산유국인 사우디는 18일 “재정적자를 줄이기 위해 올해 정부 지출을 지난해보다 5% 줄이겠다”고 선언했다. 133억 달러(약 16조3510억 원)에 달하는 규모다. 바레인 역시 국채 발행 계획을 중단하고 서방국 대형은행과 직접 10억 달러 대출 협상에 나섰다.

이처럼 저유가는 중동 주요국의 재정에 엄청난 타격을 안기고 있다. 국제통화기금(IMF)에 따르면 올해 균형 재정을 맞추기 위한 각국의 유가 수준은 바레인 93달러, 사우디 78달러, UAE 68달러, 쿠웨이트 49.7달러다. 20달러대 초반인 현재 유가로는 엄청난 적자가 불가피하다. 당연히 국민에게 쓸 돈이 줄어 정정 불안이 가속화할 수밖에 없다.

경제 개혁과 산업 다각화를 공격적으로 진행하느라 최근 몇 년간 중동 주요국의 빚도 이미 눈덩이처럼 불어난 상태다. 이 와중에 코로나19로 인한 전 세계 경기 부진, 사우디와 러시아의 공격적인 증산 경쟁까지 겹쳐 유가가 더 떨어질 가능성이 높다.

저유가→재정수입 감소→경제개혁 차질→국민 불만→정정 불안의 악순환이 나타날 수 있다는 의미다. 최근 사우디 ‘실세’ 무함마드 빈 살만 왕세자가 왕위 계승 경쟁자인 삼촌과 사촌형을 체포한 것도 폭발 직전인 국민 불만을 선제적으로 차단하고 공포 분위기를 조성하려는 포석이라는 분석이 나온다.

일본 미즈호증권은 원유 판매자가 판매비까지 부담하는 소위 ‘마이너스(―) 유가’ 시대 가능성까지 점쳤다. 현재 세계 원유 수요는 하루 약 1억 배럴인데, 코로나19로 인한 경제 위축으로 수요가 20% 감소할 것으로 내다봤다. 즉 하루에 2000만 배럴씩 남는 원유를 저장할 공간이 부족한 상황에서 증산 경쟁이 이어지면 판매자가 유통비까지 부담하며 석유를 파는 일이 불가피하다는 뜻이다.

○ 국가부도 가능성까지

일각에서는 이란, 레바논 등이 국가부도 위험에 처할 수 있다고 우려한다. 특히 2만 명이 넘는 코로나19 감염자가 발생했고 신정일치 체제를 내세운 권위주의 정권이 41년간 장기 집권 중인 이란이 위험하다는 지적이 잇따른다. 뉴욕타임스(NYT)는 현 사태가 이란, 이라크, 베네수엘라, 리비아 같은 석유의존도가 높고 재정 상태와 외채 상환 능력이 빈약한 국가에 큰 타격을 입힐 것이라며 부도 위험을 거론했다.

공공부채 비율이 GDP의 약 170%인 레바논은 9일 만기가 도래한 달러채권 12억 달러(약 1조5000억 원)를 갚을 수 없다고 선언했다. 다음 달과 6월에도 각각 7억 달러, 6억 달러를 상환해야 한다.

국가부도 사태가 온다고 해도 IMF의 구제금융을 받는 것조차 쉽지 않다. 현 집권세력이 이란의 지원을 받는 시아파 무장단체 헤즈볼라와 밀착한 탓이다. IMF 최대 주주인 미국은 헤즈볼라를 테러단체로 지정해 구제금융에 상당한 난관이 예상된다. 월스트리트저널(WSJ)은 “많은 중동 국가가 2014년 국제유가 급락 후 빚을 늘렸다. 레바논처럼 미 달러에 대한 연동제(페그제)를 실시하는 나라들은 금융위기에 특히 취약하다”고 지적했다. 세계은행은 레바논 인구 약 600만 명 중 40%가 빈곤층으로 전락할 수 있다고 경고했다.
 
이세형 카이로 특파원 turtle@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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