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 깊은 곳의 ‘억울함’을 경청해주세요[오은영의 부모마음 아이마음]

  • 동아일보
  • 입력 2020년 3월 24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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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9> 사춘기 아이의 고집

일러스트레이션 김수진 기자 soojin@donga.com
일러스트레이션 김수진 기자 soojin@donga.com
오은영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소아청소년클리닉 원장
오은영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소아청소년클리닉 원장
조금 소심하긴 해도 머리가 무척 좋은 중학교 1학년 남자아이가 있었다. 아이는 늘 무기력했고, 아무것도 하고 싶어 하지 않았다. 부모에게 크게 반항하는 건 아닌데 무슨 말을 해도 도통 듣질 않았다. 이야기를 나눠 보니 그렇게 부모를 애먹일 아이는 아니었다. 무척 양순하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아이가 그렇게 의욕을 잃고 부모 말을 안 듣게 된 이유에는 마음 깊은 곳에 쌓여 있는 억울함이 있었다. 그 억울함의 중심에는 ‘아빠’가 있었다.

아이는 아빠가 본인 생각만 옳다고 우기면서 자기 말은 도통 들으려 하지 않는다고 했다. 자기가 조금 어려운 책을 읽고 이야기를 하면, 대학교수인 아빠는 대뜸 “그건 네가 잘못 알고 있는 거야”라고 했다. 물론 아이가 알고 있는 사실이 부정확해서 제대로 알려주려고 했을 것이다. 하지만 이 아빠는 모르는 게 있다. 아이들이 자신이 읽은 책, 혹은 지식에 대해서 이야기할 때는 부모로부터 인정을 받고 싶기 때문이다. “우와, 너 그런 것도 아는구나! 아들 제법인데!” 하는 말을 듣고 싶은 것이다. 그런데 아빠는 칭찬은커녕 매번 틀렸다는 지적과 잔소리 같은 설명만 늘어놓았다. 가족 여행을 앞두고 여행지나 숙소를 정할 때도 다 아빠 마음대로였다. 아이가 의견을 내면 “모르는 소리 마. 이렇게 해야 더 좋아” 하면서 들은 척도 안 한단다.

결정적으로 아빠는 두 살 터울의 여동생만 편애한다고 했다. 한번은 동생이 하도 자기를 툭툭 치고 건드리기에 참다못해 한 대 쥐어박았는데 동생이 아파 죽겠다며 울고불고 난리를 쳤다. 아빠는 동생을 왜 때렸느냐며 이 아이만 혼냈다. 아이는 억울해했다. 그 점에 대해서 따진 적도 있었다. 아빠는 동생은 어린 데다 여자라서 그렇다고 설명했다. 아이는 그 말이 납득이 안 된다고 했다. 자기는 아주 어릴 때부터 언제나 “넌 오빤데…” 하면서 용서해 준 적이 없었단다. 아이는 이 얘기를 하면서 서럽게 울었다. 이젠 아빠가 무슨 말을 해도 안 듣고 싶다고 했다.

사람은 언제 억울함을 느낄까? 진실을 담아 솔직하게 얘기했는데 상대가 믿어주지 않을 때, 상대가 부당한 힘을 행사할 때, 자존심이 뭉개졌을 때, 아무리 노력해도 상황이 바뀌지 않을 것 같아 무력할 때 억울함을 느낀다. 그땐 어떤 행동을 할까? 화를 낸다. 반항하고 소리를 지른다. 자신을 규제하는 체제를 무시하거나 상대방의 말을 듣지 않으려 한다. 심하면 기분이 울적해지고 마음이 가라앉기도 한다. ‘내가 이 정도밖에 안 되니까 이런 대우를 받지’ 하는 자책 혹은 열등감에 빠진다. 어떤가? 사춘기 아이들의 행동 특성과 많이 비슷하지 않은가. 사춘기 아이들은 억울함이 많다. 자세히 들어보면 정말 억울할 만한 일도 많다.

무슨 말을 해도 안 들을 때는 아이의 행동 저변에 ‘억울함’이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을 좀 해 봤으면 한다. 그리고 조금이라도 말을 듣게 하려면, 그 억울함을 좀 풀어줘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단순한 문제 상황이 걷잡을 수 없는 태풍이 되기도 한다. 앞 사례와 같은 경우라면 자랑을 할 때는 조금 미흡해도 아이의 기분에 맞춰 칭찬도 해주고, 의견을 낼 때는 반영도 해줘야 한다. 형제간의 갈등에서도 부당한 것은 부당했다고 인정도 해줘야 한다.

나는 이 아이 아빠에게 “남자아이들은 여자아이들보다 청소년 시기가 1, 2년 정도 늦게 시작되기도 한다”고 말해주었다. 두 살 차이면 두 아이의 성숙도는 거의 비슷하다고 봐야 한다. 그러니 오빠라서 이해하고 양보해야 한다는 말은 이제 그만하고 아이가 억울해하는 걸 좀 들어주고 인정해달라고 했다. 특히 동생이 시작했는데 마지막 반응 때문에 오빠가 혼나게 된 경우는 더 그렇다. 이럴 때는 잘못을 구분해서 이야기해야 한다. “동생이 너를 툭툭 건드린 건 분명 먼저 잘못한 거야. 그건 아빠가 나중에 따로 동생과 이야기할 거야. 동생이 그러니까 너도 화가 나서 때렸다는 건 아빠도 알아. 하지만 폭력은 어떤 경우에도 좋은 해결 방법이 아니야”라고 얘기해주는 것이 좋다. 무조건 남자가 여자를 보호해야 한다고 가르치는 것도 그다지 바람직하지 않다. 그보다는 사람은 상대가 남자든 여자든 늘 상대방을 존중하고 보호해 줘야 한다고 가르치는 편이 좋다.

 
오은영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오은영 소아청소년클리닉 원장



#사춘기#상대방 존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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