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는 국민에게 ‘예측’되어야 한다 [우아한 청년 발언대]

  • 동아일보
  • 입력 2020년 3월 2일 14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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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 경제 침체의 중요한 원인 중 하나는 정권이 주민들에게 한 약속을 전혀 지키지 않았기 때문이다. 2014년 유엔 인권이사회 보고서에 따르면, 한 농장원이 “수확량의 90%를 우리가 가질 수 있다고 들었으나, 추수를 하고 나자 군인들이 와서 모든 것을 가져가버렸다”고 보고했다. 열심히 일한 몫이 보장될 것이라 기대했는데, 정권의 행태는 정반대였다는 것이다.

대외무역에 있어서도 비슷하다. 북한 기업과 교역하는 단둥의 중국 기업들을 설문조사한 결과, 가장 큰 어려움으로 북한 당국의 예측할 수 없는 정책 변화가 꼽혔다. 북한의 큰 소비재 시장과 낮은 임금이라는 장점을 상쇄하는 단점이었다. 다분히 충동적인 북한 정권의 특성은 예측불가능성이었다. 이러한 환경 하에서는 민간이 경제적 성과를 달성할 유인이 다분히 약화된다. 결국 북한 경제 규모는 1990년부터 2013년까지 연평균 0.9%씩 감소했다. 그리고 지금, 저조한 경제실적은 정권에게 큰 위협으로 돌아왔다.

남한은 어떨까. 안타깝게도 한국 정부의 신뢰도(‘정부를 신뢰하느냐’라는 물음에 ‘그렇다’라 대답한 국민의 비율)는 절대적으로 낮은 편이다. 우리나라에서 최근 10년간 정부신뢰도는 23~39%에 불과하다. 뒤집어 말하면 60~80%에 달하는 국민들이 정부를 불신한다는 것이다. 2019년 기준으로 정부신뢰도는 39%로서 역대 최고치를 기록하긴 했으나, 여전히 OECD 국가들의 평균에 미치지 못하는 실정이다. 이런 환경에서는 정책이 제대로 기능하기 어렵다. 정부에 대한 불신이 발생한 이유는 북한과 크게 다르지 않다. 정책이 국민의 예상을 빗나갔고, 그 결과 신뢰가 형성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보수정권과 진보정권을 망라하는 여러 사례가 있다. 2004년 노무현 정부 당시 철도청은 KTX 개통 직전, 철도청에 파견 근무하는 형식으로 비정규직 승무원들을 공개채용하면서 이후 정규직으로 전환할 것을 약속했다. 하지만 2년 후 2006년, 철도청은 이들을 정규직으로 전환하기는커녕 해고하려 했다. 그러면서 법적 효력이 없는 구두 약속이었으며, ‘정규직’도 ‘타 기관의 정규직’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해명했다.

2007년 7월 KTX 여승무원들이 정리해고 철회와 직접고용을 요구하는 단식농성을 하고 있다.
2007년 7월 KTX 여승무원들이 정리해고 철회와 직접고용을 요구하는 단식농성을 하고 있다.

결국 재판기간까지 10년이 넘는 소송이 이어졌고, 승무원들의 ‘법적 판결에 따른 복직’은 무산됐다. 이 과정에서 금전적·시간적 비용도 물론 많이 들었으나, 가장 큰 손해는 정부기관을 믿지 못하겠다는 여론이 강해졌다는 것이다. 법리적인 증거가 없어 철도청에게 책임을 지울 수 없을지 몰라도, 도의적으로는 강력히 비판받을 문제이다. 지키지 못할 약속을 함부로 했다. 가벼운 말 한 마디가 노동자들에게 어떻게 받아들여질지 생각하지 않았던 것이다.

여승무원들의 정규직으로의 전환 거부가 사측의 경제적인 판단이었기 때문에 합리적이라는 주장이 있을 수 있다. 그러나 국민들이 철도청의 예측불가능성을 목도한 순간, 다른 정부기관에까지 파급효과를 낼 수 있다. 이 대가는 영속적이다. 장기적으로 더 큰 경제적 손실로 이어질 수도 있다는 것을 생각하면, 경제적 의사결정으로 약속을 지키지 않는 것이 오히려 합리적이지 않을 가능성이 높다. 다행히도 2018년, 코레일은 사태가 시작된 지 12년 만에 해고됐던 노동자들을 특채 형식으로 고용하며 늦게나마 약속을 지켰다.

박근혜 정부 때인 2015년 메르스 유행에서도 비슷한 패턴을 읽을 수 있다. 보건당국은 국민들의 과도한 불안을 막는다는 명목으로 의료진들에게만 관련 정보를 공개했다. 정보 단속은 국민들의 불신만 유발했다. 정부가 전염병 사태에 대해 무언가를 감추고 있다는 인식을 지워 버릴 수 없었다. 헛발질도 계속됐다. ‘곧 종식될 것’이라던 메르스는 갈수록 심각해졌고, 공장들이 멈춰 서기까지 했다. 국민들이 정부를 예측할 수 없게 됐다. 국민들은 분노했고, 재난 시 정부를 믿기보다는 각자도생해야한다는 인식이 팽배해졌다. 국민들은 SNS로 정보를 유통했고, 이 과정에서 검증되지 않은 가짜뉴스가 퍼지는 것을 막을 수 없었다. 심각한 부작용이었다. 메르스는 감염자 186명, 사망자 38명과 함께 수조 원의 국내총생산 손실을 내면서 214일을 끌었다. 2016년 경주 지진 때는 정부의 재난안내문자 대신 일본 기업이 만든 지진 알림 어플리케이션을 사용하는 시민들도 생겨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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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재인 정부 핵심 당국자들도 신종 코로나 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대응 과정에 자신들의 말에 책임지지 못하고 갈팡질팡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13일 대통령은 ‘코로나19는 머지않아 종식될 것’이라고 발언했다. 그러나 열흘도 지나지 않아 ‘규정에 얽매이지 말고 전례없는 강력대응을 하라’고 방역기관에 요구했다. 말을 뒤집은 것이다. 당정청 협의회에서는 대구-경북지역에 최대한의 봉쇄 조치를 하겠다고 발표했다. 반발이 일자 그런 뜻으로 말한 것이 아니라고 국민들에게 해명했지만, 불안감이 조성됐다는 평가가 나온다. 29·30번 확진자의 경우, 정부는 감염경로도 파악하지 못했으면서 지역사회 감염이 아니라고 부인했다. 지역사회 감염이란 감염자가 언제 어디서 감염됐는지 역학적 연관성이 확인되지 않는 감염을 말한다. 정부가 거짓말을 했던 것이다. 국민들의 불만이 높아지자, 여당의 한 중진의원이 나서서 ‘여권 전체가 국민들에게 안심을 줄 수 있는 메시지 관리에 실패하고 있다’고 자아비판을 해야만 했다.

그동안 코로나19는 대유행의 단계에 접어들었고, 여전히 정부는 우왕좌왕하고 있다. 앞서 글에서 썼듯이, 전염병 대응의 키워드는 단연코 ‘신뢰’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정부가 예측되지 못하는 상황에서는, 국민들은 정부 시책에 따르기보다는 자력구제로 예방하고자 할 것이다. 결과적으로 보건당국은 국민들을 방역체계로 동원하기 어렵게 된다. 국민들은 전문적인 컨트롤타워가 아닌 SNS의 비전문적 정보를 더 믿게 된다. 공중보건은 기본적으로 공공재적 성격을 가지는데, 방역이 개인화되면서 이 최선(first-best)의 정책이 무너진다. 결국 전염병에 대해 각자가 ‘자구책’을 마련해야 하는 차악(second-worst)의 방법이 사회적으로 선택된다. 생필품을 집에 쟁여 두는 사재기 현상이 대표적이다. 정부 신뢰가 결여되어 국가는 힘을 잃고, 사회는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으로 회귀하게 된다.

문제의 근본원인은 정부가 국민들의 입장에서 생각해 보지 않기 때문이다. 일관성 없는 태도가 국민들을 얼마나 불안하게 할지, ‘봉쇄조치’가 주는 어감이 어떠한지 제대로 알지 못한다. 근거 없이 낙관적으로 상황을 파악해서, 침몰하는 와중에서도 국민들에게 ‘제 자리에 있으라’고 ‘협박’할 뿐이다. 냉정하게 사실을 직시하는 대신 희망사항을 말하는데 급급하다. 정보를 최대한 감추고 사태를 빨리 극복하고 싶어서 안달이다. 정부가 이런 모습을 보이는 까닭은, 정부가 국민들을 국정 협력의 파트너라기보다는 피치(被治)의 대상으로 보기 때문이다.

문재인 대통령이 지난해 11월 23일 오후 청와대 본관 충무실에서 공식방한한 리셴룽 싱가포르 총리 부부를 위해 공식오찬을 열었다. 청와대사진기자단
문재인 대통령이 지난해 11월 23일 오후 청와대 본관 충무실에서 공식방한한 리셴룽 싱가포르 총리 부부를 위해 공식오찬을 열었다. 청와대사진기자단

이번 코로나19와 관련해 인상 깊은 사례를 하나 소개한다. 싱가포르의 리셴룽 총리는 감염원을 알 수 없는 환자들이 발생하자 직접 영상 담화문에 출연했다. 그는 더 이상은 전염병의 확산을 막기가 어렵다고 정직하게 밝히는 동시에, 국민의 두려움과 불안은 당연하다며 공감하는 모습을 보였다. 보건당국이 노약자 등 취약 환자에 집중하겠다는 새로운 전략을 밝히면서, 국민들에게 경증자의 자가격리, 손씻기와 체온 재기를 부탁했다. 싱가포르 당국은 합리적으로 대응했다. 덕분에 국민들은 감염상황과 정책방향을 예측하고 정부에 협동할 수 있게 됐다. 외신들은 리 총리의 담화 이후 사회가 안정을 되찾았다고 평가했다. 전날까지 극심하던 사재기 현상은 다음 날 깨끗이 사라졌다.

손세호 서울대 경제학부 16학번(서울대 한반도문제연구회)
손세호 서울대 경제학부 16학번(서울대 한반도문제연구회)
다른 게 소통이 아니다. 국민들과 눈높이를 맞추어, 국민들과 협력할 수 있어야 한다. 한국사회는 고도로 민주화되어 있다. 더 이상 개발기의 독재가 먹혀들지 않는다. ‘협박’대신 ‘설득’으로 가야 한다. 21세기 한국 정부는 정책적 조건형성부터 시작해야 한다. 지금부터라도 정부가 진정성 있게 대응한다면, 이번 코로나19 위기국면은 정부의 예측가능성을 어필하는 좋은 기회가 될 수 있다. 이를 위해 정부가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말과 행동을 일치시키는 것이다. 정직한 말을 하고, 책임 있는 행동으로 국민을 설득하라. 정부는 국민에 의해 전적으로 ‘예측’될 수 있어야 한다. 그래야 국민들이 정책에 동원될 수 있으며, 국가는 일촉즉발의 상황도 위기일발의 국면도 극복할 수 있게 된다. 정직함과 책임감이 없으면, 설득도 없고 신뢰도 없다. 사회의 불안과 불만만 깊어진다. 국민이 협력하지 않는 정치권력의 말로(末路)가 어떠한지는 역사책의 아무 페이지나 펴서 찾아보라.

손세호 서울대 경제학부 16학번(서울대 한반도문제연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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