젊은 직원들 “직무급제 합리적” 공감… 공기업 아직은 호봉제 보완 수준[인사이드&인사이트]

  • 동아일보
  • 입력 2020년 2월 28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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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공기관-금융권 도입 어디까지

“동기들 모두 지점장은 힘들어서 웬만하면 안 하려고 했는데 직무급제를 도입한 다음부터는 서로 하려고 합니다.”

교보생명 입사 3년 차인 김정민(가명·33) 씨는 올해 초 모두가 기피하는 지방 지점장 자리에 지원했다. 보험 지점장은 말 그대로 영업직이다. 보험설계사 50여 명을 관리하며 실적 압박을 받는다. 더구나 수당 등을 빼면 본사에서 일하는 같은 직급과 월급도 큰 차이가 없다.

대개 고참 과장이나 부장들이 맡아온 지점장에 사원급인 김 씨가 손을 든 것은 올해 1월 1일부터 금융권 최초로 교보생명이 시행한 직무급제 때문이다. 직무급제는 업무 난이도와 성격, 책임 강도 등에 따라 같은 직급이라도 급여를 달리한다. 교보생명은 자체적으로 모든 직무를 A(사원), S(대리), M2(일반 과장), M1(지점장), L1∼3(부장급)의 7단계로 나눴다. 사원은 A직급이지만 지점장을 하면 M1의 급여를 받는다. 기본급이 연 4000만 원인 김 씨는 지점장이 되면서 본사 근무 동기들보다 연 200만 원 이상 더 받게 됐다.

힘든 부서에서 일하면 연봉이 오를 뿐 아니라 승진도 빠르다. 회사가 고생해서 일한 직원을 인사로 보상해주는 것이다. 김 씨는 “연봉이나 승진 때문에 사원들 사이에서 높은 직무를 맡으려는 분위기가 생겼다”면서 “동기 부여는 확실히 되는 것 같다”고 말했다.

○ “일한 만큼 받는다” 젊은 직원들 만족도 높아


정부는 직무급제 도입에 강한 드라이브를 걸고 있다. 기획재정부는 올해부터 직무급제 도입 공공기관에 경영평가 가점을 주기로 했다. 지난달에는 고용노동부가 직무급제 지원 방안을 발표하면서 민간기업의 시행을 독려했다. 대통령 공약인 직무급제를 공공과 민간 부문 양쪽에서 본격적으로 밀어붙이겠다는 것이다.

그동안 국내 기업 대부분이 채택하고 있던 호봉제는 근속 연수에 따라 임금이 오르는 구조라 중장년층 근로자에 대한 인건비 부담이 컸다. 반면 직무급제는 맡은 업무의 성격과 난이도에 따라 보상을 받기 때문에 정년 연장에 대비해야 하는 기업들이 상대적으로 선호한다. 이렇게 아낀 인건비로 청년 채용을 더 많이 할 수 있다는 것도 장점으로 꼽힌다.

공공기관 중에선 지난해부터 석유관리원, 새만금개발공사, 재정정보원, 산림복지진흥원 등이 직무급제 도입을 발표했다. 대형 기관 중에서는 KOTRA가 올 상반기 중에 직무급제를 시행한다. 이 밖에 올해 10여 곳이 추가로 직무급제를 도입할 것으로 보인다.

직무급제를 도입한 기업 직원들의 반응은 생각보다 좋은 편이다. 특히 20, 30대 젊은 직원들의 만족도가 높다. 한 공공기관의 인사 담당자는 “젊은 직원들은 직무 중심으로 임금체계를 바꿔야 한다는 데 동의하고 중요한 업무를 하는 사람이 돈을 더 많이 받아야 한다는 것에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는다”고 했다. ‘워라밸(일과 삶의 균형)’ 문화가 정착되면서 본인이 핵심 보직에서 돈을 더 받으면서 일할지, 아니면 돈을 적게 받더라도 쉽고 편한 일을 할지를 선택할 수 있다는 점도 매력적이다.

성과연봉제보다 직무급제가 상대적으로 ‘평가 스트레스’가 덜하다는 점도 직원들의 환영을 받는 요인이다. 성과연봉제에서 최근 직무급제로 갈아탄 재정정보원의 한 인사 담당자는 “성과 압박이 덜하고 직무에 따라 예측 가능한 월급을 받을 수 있어 만족도가 높은 편”이라고 했다.

한 공공기관의 입사 6년 차 직원은 “직무급제가 도입되면 적어도 ‘왜 나는 저 사람보다 많이 일하는데 월급이 적거나 같을까’ 생각하면서 화내는 일은 줄어들 것 같다”고 했다.

○ 아직 실제 월급 차이는 미미…“무늬만 직무급제” 지적도

공공기관과 금융회사들의 직무급제 도입이 늘고는 있지만 ‘전면 도입’까지는 갈 길이 멀다. 전체 급여 중 일단은 극히 일부에만 직무급제를 적용하는 방식을 주로 쓰고 있기 때문이다. 현재 직무급제를 도입했거나 시행을 준비 중인 기관들은 직급 간 월급 차이가 5만∼10만 원 정도에 불과하다. 직무급제의 본래 취지대로라면 직무에 따라 직급과 연봉이 달라야 하는데 직급에 따른 기본연봉은 그대로 두고 직무수당에서만 차이를 두는 방식도 쓰인다. 도입을 준비 중인 A기관 직원은 “직무급제를 하더라도 월급에 큰 차이가 없어 직원들이 효과를 체감하기 어려울 정도”라고 말했다.

급여체계를 일부만 바꾸다 보니 겉은 직무급제지만 속은 호봉제인 기관도 상당수다. KOTRA는 직무급제를 도입하면서 업무를 4단계로 나눠 수당과 성과급에 차이를 뒀지만 급여의 75%에 이르는 기본급은 여전히 호봉제를 유지한다. 기존 40호봉을 16호봉으로 축소해 연공성을 다소 완화한 정도다. 직무급제 시행을 준비 중인 B기관은 근속 연수에 따른 수당을 이름만 바꿔 직무급에 포함시키기로 했다. 연차가 쌓일수록 수당이 높아지는 체계가 유지되는 것이다.

전 직원이 아니라 일부 직원에만 직무급제를 도입하는 기관도 있다. 한국수력원자력은 전체 직원의 30%인 비(非)노조원에만 직무급제를 적용한다.

금융권에서는 교보생명 정도만 직무급제 시행에 들어갔을 뿐 다른 금융회사들은 아직 시행을 검토조차 하지 못하는 상황이다. 이는 정부의 영향권에 있는 금융공기업들도 마찬가지다. 호봉제 철폐에 대한 금융노조의 반발이 만만치 않기 때문이다.

직무급제 도입을 놓고 내홍을 겪은 가장 최근 사례는 IBK기업은행이다. 노조의 반대로 임명 후에도 약 한 달간 출근을 못한 윤종원 행장은 ‘직무급제 도입 등을 노동조합이 반대하면 추진하지 않는다’고 약속한 뒤에야 출근할 수 있었다. 방문규 한국수출입은행장도 언론에 “직무급제 도입에 대한 스터디를 하고 있다”는 말을 했다가 노조의 항의를 받고 “노조가 반대하면 추진하지 않겠다”며 꼬리를 내렸다. 이달 6일 금융노조 정기전국대의원대회에서는 올해 주요 사업계획 중 하나로 직무급제 강제 도입 저지가 포함됐다.

340개에 이르는 공공기관도 직무급제 논의가 더디기는 마찬가지다. 직원 수가 많고 규모가 큰 공무원연금공단, 한국전력 등은 민노총과 한국노총 등 상급단체에 도입 협상을 아예 위임했다.

다만 일부 신생 기관에서는 직무급제를 전면적으로 도입하는 과감한 ‘실험’을 하기도 한다. 2018년 9월 신설된 새만금개발공사는 지난해 8월 직무급제를 시행했다. 이 기관은 전 직원의 급여 수준을 연공서열과는 전혀 상관없이 5단계로 나눈 직무에 따라서만 정하고 있다. 직원들의 임금 인상폭 역시 직무에 따라 달라진다. 연차에 따른 기본급이 남아있는 다른 기관과 다른 점이다.

○ “나이든 직원들 박탈감도 달래야”

직무급제 도입의 가장 큰 난관은 직무를 어떻게 나누고, 각각에 어떤 보상을 할지를 결정하는 일이다. 이 과정이 매끄럽지 않으면 자칫 직군 간에 노노(勞勞) 갈등이 생길 수 있다. 한수원 노조 관계자는 “원자력발전소마다 운영 방식이 다르고 수많은 직무가 있어 직무 평가 자체가 어렵다”면서 “평가 방식에 대한 논의가 필요한데 일단 도입부터 하라니 문제가 생긴다”고 했다. C공공기관의 인사 담당자도 “누구나 내가 맡은 일이 가장 힘들고 어렵다고 생각하는데 누구는 월급을 더 주고 누구는 덜 준다는 것을 이해하지 못한다”라고 토로했다.

일정한 기간이 지나면 직무를 바꾸는 순환보직 체계도 걸림돌이다. 본인의 능력이나 의지와 상관없이 보직이 자주 바뀌며 급여가 달라지는 것을 받아들이지 못한다는 것이다. D기관 관계자는 “공공기관은 개인별 성과에 따라 부서를 배치하지 않고 이른바 무작위로 ‘뺑뺑이’를 돌리는 경우가 많다”며 “이런 잦은 인사 이동에 따라 직원들의 월급이 달라지면 문제가 생길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연차가 높으면서 급여가 낮은 직급에 있는 중장년 직원들의 불만도 크다. 나중에 연봉이 높아질 것을 기대하고 박봉을 감수했는데, 갑자기 직무급제로 전환되면서 기존 호봉제의 혜택을 받지 못하게 됐기 때문이다. 교보생명도 직무급제 도입 이후 전체 직원 중 10%의 급여가 낮아지자 노조가 하위 직무로 이동한 79명의 직원을 대리해 사측에 이의를 제기했다.

전문가들은 직무급제 시행을 너무 서두르기보다는 점진적으로 개선할 필요가 있다고 조언한다. 박진 한국개발연구원(KDI) 국제정책대학원 교수는 “기성세대는 젊을 때 급여가 적어도 나이가 들면 호봉이 오를 것으로 기대하고 살아왔는데 보상받을 시기에 갑자기 직무급제로 바뀌면 반발하는 것이 당연하다”면서 “시간을 갖고 직무급 비중을 차차 늘리는 방식을 택해야 한다”고 말했다.
 
세종=최혜령 herstory@donga.com / 김형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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