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지와 맹목[임용한의 전쟁史]〈95〉

  • 동아일보
  • 입력 2020년 2월 4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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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제프 조프르는 제1차 세계대전 개전 당시 프랑스군 총사령관이었다. 프랑스 장군들이 대부분 그렇듯이 그는 권위적이고 고집이 강했다. 개전 초 그는 독일의 슐리펜 계획을 예측하지 못했다. 벨기에로 우회해서 파리로 진군하는 것이 독일의 주공인 것 같다는 전선에서의 전황 보고도 무시해 파리를 함락 직전의 상태로 빠뜨렸다. 그러나 거듭된 실수와 패전에도 그는 투지를 잃지 않았다. 조프르의 운전기사는 카레이서 출신이었는데, 혼란한 파리시내에서 번개같이 차를 몰았다. 조프르는 마지막 순간에 극적으로 독일군의 실수를 물었고, 마른강 전투에서 슐리펜 계획을 좌절시키는 기적을 이루었다.

독일군의 실수가 없었더라면 마른강의 기적은 없었을 것이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지만, 실수 없이 전쟁을 치를 수 없다. 적의 실수를 유도하는 것도 전술의 기본이다. 내가 아무리 멋진 전술을 세워도 적이 강하고 탄탄하다면 쉽게 승리할 수 없다. 적이 예측하지 못한 전술을 사용하는 이유는 적을 당황시키고 판단을 흔들기 위해서다. 불가능할 것 같은 상황에서도 강인하게 저항해야 하는 이유는 적의 의도나 작전 시간표를 방해함으로써 적의 오판과 실수를 유도하기 위해서다.

이릉 전투에서 유비는 양자강을 따라 서진하다 육손의 지연 전략에 말려들었다. 전선이 늘어지고 보급이 어려워지면서 촉군이 사용할 수 있는 전술은 갈수록 뻔해졌다. 상황을 압박해 상대가 선택할 수 있는 경우의 수를 제한하면서 결정적 순간을 노리는 것이 육손의 전략이었다. 이릉 전투는 촉의 운명을 건 전투였고 유비의 투지는 확고부동했다. 그러나 그 투지가 경직된 판단을 낳았다. 답은 없지만 교훈은 분명하다. 전쟁에서 투지란 맹목적인 의지가 아니라 ‘정확한 판단’이란 돌파구를 향해 분투하는 행위라는 것이다. 간혹 사람들은 맹목을 투지로 착각하고, 부족한 능력을 투지라는 허울로 덮으려고 한다. 그것은 더 큰 파멸을 낳는다. 현장마저 무시하는 방구석 투지는 더욱 위험하다.
 
임용한 역사학자
#조제프 조프르#제1차 세계대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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