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난민[임용한의 전쟁史]〈87〉

  • 동아일보
  • 입력 2019년 12월 10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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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은 난민을 낳고 난민 정책은 인간의 양심을 시험한다. 우리 역사에도 그런 사례가 있다. 후금을 세운 누르하치가 요동을 점령하자 군대와 난민 일부가 조선으로 들어왔다. 명나라 장군 모문룡은 가도와 주변의 섬을 점거하고 조선에 구호를 요청했다. 조선은 처음에는 명나라 군대에 빚진 것도 있고 모문룡의 명군이 후금을 견제하는 데 도움이 되겠다는 기대도 했다.

그러나 상황은 점점 악화되기 시작했다. 모문룡은 요동 난민 20만∼30만 명을 받아 군을 재건하고 후금을 공격하겠다고 큰소리를 쳤다. 그러면서 조선에 요구하는 물량을 점점 늘려나갔다. 섬이 좁아지자 난민을 육지로 보내 거주시켰다. 지방관에게 닥치는 대로 물품을 요구했고 성에 차지 않으면 민가를 약탈했으며 지방을 공격하기까지 했다. 그 피해가 얼마나 컸는지 조선이 정묘호란에 제대로 대비하지 못한 이유가 모문룡 때문이라고 말할 정도였다. 나중에는 조선인을 죽여 명나라에 후금군을 죽였다고 속였다. 기회를 봐서 조선을 정복하려는 음모를 꾸몄다는 설도 있다.

난민이야 불쌍하지만 모문룡과 폭력적인 난민은 조선에 골칫거리로 전락한다. 이 고통을 해결해 준 사람이 명나라의 명장 원숭환이었다. 요동-가도-조선을 연결해 후금에 대항하려는 구상을 했던 원숭환은 모문룡을 살해하고 그의 군대를 흡수하려 했다. 이게 잘 안되고, 나중에 원숭환도 처형되자 모문룡의 잔당은 후금에 투항했다. 이들은 병자호란 때 남한산성을 파괴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당시 외교 상황이나 국내 사정상 불가능에 가까운 가정이지만 조선이 적극적인 난민 수용 정책을 펴고, 이 부대도 흡수했다면 어땠을까. 그들이 병자호란에서 우리 편이 되어 공을 세웠을 수도, 새로운 피해를 초래하고 종국에는 비극적인 갈등이나 선택을 일으켰을 수도 있다. 세상사가 어려운 것은 좋은 결과만 얻는 정책은 없기 때문이다. 예나 지금이나 갈등과 딜레마 없는 해결책은 없나 보다.
 
임용한 역사학자
#전쟁#난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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