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끼리 감독’ 팔순 잔치와 하와이 항명 사건의 추억[광화문에서/이헌재]

  • 동아일보
  • 입력 2019년 12월 5일 03시 00분


코멘트
이헌재 스포츠부 차장
이헌재 스포츠부 차장
큰 덩치 때문에 ‘코끼리’란 별명으로 불렸던 김응용 대한야구소프트볼협회장(79)은 현역 감독 시절 살가운 지도자가 아니었다. 눈 한번 부라리면 날고 기는 스타 선수들도 모두 몸을 사렸다. 잘못 옆에 있다간 불호령이 떨어질 수 있었다. 그가 내던진 의자에 맞는 일도 있었다.

강력한 카리스마로 선수들을 휘어잡았던 김 감독이 어느새 팔순이 됐다. 음력 1940년 3월 1일생이니 내년 초 팔순을 맞는다.

조용히 식사나 하려던 김 회장의 생각과 달리 제자들은 폼 나는 ‘팔순 잔치’를 준비했다. 10일 서울시내 한 호텔에서 잔치를 연다. 이 자리에는 한국 프로야구를 빛냈던 별들이 대거 모인다. 해태와 삼성 시절 제자였던 선동열 전 감독과 김성한 김기태 전 KIA 감독, 유승안 한대화 전 한화 감독, 양승호 전 롯데 감독, 이순철 전 LG 감독, 류중일 LG 감독, 이강철 KT 감독 등 전현 감독만 무려 9명이다. 이종범, 양준혁, 이승엽, 마해영 등도 십시일반 힘을 보탰다.

감독 시절 제자들과의 관계가 썩 좋은 건 아니었다. ‘국보급 투수’로 활약했던 선동열 전 한국 대표팀 감독이 김 회장에게 들은 최고의 칭찬은 “수고했다”, 한마디였다.

욕 안 먹고 혼만 나지 않아도 다행이었다. ‘해결사’ 한대화 전 감독은 1990년 올스타전 도중 ‘코 감독’에게 발길질을 당한 적이 있다. ‘국민 타자’ 이승엽에게는 “타자도 아니다”라며 자존심에 상처를 입혔다.

그중 최악은 요즘 TV 해설위원으로 활약하고 있는 이순철 전 감독과의 관계였다. 해태 시절이던 1996년 2월 하와이 전지훈련 도중 선수단은 코칭스태프의 강압적인 대우에 집단 반발했다. 이른바 ‘하와이 항명 사건’ 당시 선수단 리더가 바로 이 전 감독이었다. 김 회장은 1997시즌 한국시리즈 출전 선수 명단에서 이 전 감독을 빼버렸다. 이 전 감독은 이듬해 삼성으로 쫓겨나듯 이적했다. 건널 수 없는 강을 건넜다고 모든 사람들이 생각했다.

아이러니하게도 이번 ‘팔순 잔치’의 중심에 선 사람이 이 전 감독이다. 그는 ‘감독님 팔순 잔치 추진위원장’ 완장을 차고 행사를 주도적으로 준비하고 있다. 예전의 앙금은 모두 사라진 것일까. 이 전 감독은 “세월 흐르고, 나이 들어 보니 자연스럽게 지난 일은 잊게 됐다. 여러 번의 우승 등 감독님과 좋은 추억들도 많았다. 나중에 존경스러운 부분도 많이 알게 됐다”고 했다. 다른 제자들도 김 회장처럼 사심 없이 팀을 이끈 지도자를 찾기 힘들다고 입을 모은다. 김 회장은 현장에서 물러난 뒤에는 형편이 어려운 선수들에게 장학금을 주고, 야구장 건립에 사비를 내놓기도 했다. 무뚝뚝한 그답게 이 같은 사실을 주변에 알리지도 않았다.

이 전 감독은 선수 시절 김 회장으로부터 “수고했다”는 말조차 들은 적이 없다. 단 한 번 코 감독이 악수를 청한 적이 있었단다. 어떤 중요한 경기에서 만루홈런을 쳤을 때였다. 그렇게 강하게 선수들을 몰아붙이며 김 회장은 한국 프로야구에서 전무후무한 한국시리즈 10회 우승을 일궜다. 김 회장의 스타 출신 제자들은 대부분 지도자로 변신했다. 그들도 누군가를 가르쳐 보면서 비로소 옛 스승의 마음을 이해하게 됐으리라. 김 회장이 세운 금자탑에 다시 한번 고개를 숙일 수밖에.
 
이헌재 스포츠부 차장 uni@donga.com
#김응용#이순철#선동열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댓글 0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