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지혜 게임[2030 세상/정성은]

  • 동아일보
  • 입력 2019년 12월 3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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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성은 콘텐츠제작사 ‘비디오편의점’ 대표PD
정성은 콘텐츠제작사 ‘비디오편의점’ 대표PD
사법부는 대한민국에서 여성으로 사는 게 어떤 의미인지 잘 모르는 것 같다. 그런 사법부를 위한 보드 게임이 있다. ‘이지혜 게임’이다.

게임의 목표는 이지혜의 생존이다. 사회성, 순응도, 자존감, 감수성 중 하나라도 0이 되거나 스트레스가 100이 되면 이지혜는 사망한다. 게임의 여러 상황을 소개한다. 기본 점수는 50에서 시작하고, 첫 번째 카드를 뒤집으면 다섯 살 이지혜에게 이웃집 아저씨가 말을 건다.

“지혜는 커서 뭐가 될까?”

“우주비행사요!”

“아이고! 여자가 무슨 그런 일을 해∼. 미스코리아 되어야지!”

이 상황에서 이지혜의 다음 말을 고르는 것이 게임의 방식이다.

①우주비행사 할 거예요! ②여자는 미스코리아를 해야 하는구나 ③왜 안 돼요? ④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뭐, 이 정도를 성차별이라고…. 그냥 우주비행사 한다고 하면 되지 않나 싶어 1번을 고른다. 하지만 선택에는 그에 따른 다음 상황이 펼쳐진다. 다섯 살 지혜는 자신의 의견을 나타낼 수 있지만 그날 이후로 “지혜는 기가 세”라는 소리를 듣는다. 순응도가 ―10점이 되었다.

순응도를 올리기 위해 2번으로 바꾸자 이번엔 더 큰 문제가 생겼다. 다섯 살 지혜가 벌써부터 여성이 택할 수 있는 직업에 대한 편견을 갖게 된 것이다. 지혜는 이후 다시는 우주비행사의 꿈을 다른 사람에게 이야기하지 않을 수도 있다. 자존감 역시 ―10점이 되었다.

그렇다면 이유나 들어보고 싶어 지혜는 3번처럼 물었다. 아저씨는 지혜의 물음에 답을 못했다. 그도 깊이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왠지 당돌한 지혜가 못마땅하다. 이지혜의 순응도와 사회성이 각각 ―10점이 된다.

마지막으로 지혜는 자신의 꿈이 무시당하는 것이라 생각해 아무 대답도 하지 않기로 한다. 하지만 아저씨는 지혜를 만날 때마다 “우리 미스코리아”라고 불렀다. 이지혜의 스트레스가 +10이 되었다.

1번 문항을 풀었는데 벌써부터 피곤하다. 하지만 이것은 시작일 뿐이다. 열다섯 살의 이지혜는 신체 부위에 대한 말 때문에 스스로의 몸을 부끄러워하게 되고, 스무 살의 그녀는 개강총회에서 단톡방 성희롱을 당한다. 스물한 살 지혜는 성적 관계를 요구하는 남자친구를 달래느라 감정을 소모하고, 서른두 살의 이지혜는 경력 단절을 피하기 위해 출산 여부를 고민한다. 물론 다른 선택지도 있다. 하지만 당당하게 따지는 지혜도, 아무 말 못하는 그녀도 결국엔 ‘내상’을 입는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여성 연예인으로 성공한 지혜는 어떨까, 그 상황을 그려본다. 남자 친구는 관계가 소원해지자 과거 두 사람이 찍은 동영상을 유포하겠다고 협박한다.

이때 지혜가 해야 할 행동은 무엇일까? ①언론에 피해를 당했다고 고백한다 ②남성에게 애원한다 ③법과 정의를 믿고 경찰에 신고한다 ④꿋꿋하게 살아간다.

1번을 택하자 실체도 없는 ‘이지혜 동영상’이 급상승 검색어가 되었다. 2번을 택하자 그 모습이 찍힌 폐쇄회로(CC)TV 화면이 또 다른 뉴스가 됐다. 3번을 택했지만 가해자는 집행유예를 받을 뿐이다. 이런 상황에서 그녀는 스스로를 구하고자 4번을 택했다. 그녀의 용기를 잊지 않을 것이다.

정성은 콘텐츠제작사 ‘비디오편의점’ 대표P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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