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미의 ‘큰 거래’와 미국 정치의 시간[동아 시론/김정]

  • 동아일보
  • 입력 2019년 11월 27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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냉전 후 美 정치서 중도세력 사라져… 전임 정부 합의, 후임이 거부 빈번
작은 거래조차도 붕괴 위험 있다는 뜻
북-미 정상, 큰 거래 합의할 수 있지만
미 정치 양극화로 합의이행 낙관 어려워

김정 북한대학원대 교수
김정 북한대학원대 교수
무릇 협상이란 험준하기 마련이고 하물며 그것이 국가의 존립과 안보에 직결된 사안을 다루는 정치 담판의 성격이라면 그 궤도가 평탄할 리 없다. 짧게는 센토사 타결에서 하노이 결렬에 이르는 약 250일 동안 김정은 국무위원장과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펼친 정상회담부터, 길게는 제네바 타결에서 스톡홀름 결렬에 이르는 약 25년 동안 평양과 워싱턴이 주고받은 실무교섭까지 북한과 미국의 외교 흥정이 순항과 난항을 되풀이했다는 사실은 고로 전혀 놀랍지 않다. 놀라운 것은 오히려 핵무장 해제와 관계 정상화를 맞바꾸려는 지난(至難)의 30년 북-미 교섭이 두세 번의 정상 간 만남으로 쉽사리 타개될 수 있다고 믿었던 누항(陋巷)의 숙덕공론이었다.

북-미 교섭 30년 역사에서 확인할 수 있는 하나의 사실은 협상에서 도출한 합의의 이행은 시간을 대가로 요구하고, 그 난도가 높아질수록 지불해야 할 시간의 총량 또한 커진다는 점이다. ‘큰 거래’에 가까운 합의일수록 그 이행에는 보다 긴 시간이 필요하다는 말이다. 큰 거래가 높은 시간 비용을 갖는다는 사실이 함의하는 바는 합의를 타결한 행위자와 이행을 담당할 행위자가 장기간 일치해야만 그 결과가 성공적일 수 있다는 점이다. 임기 제한이 사실상 부재한 김 위원장과는 달리 트럼프 대통령은 재선에 성공해도 최대 8년까지만 그 지위를 유지할 수 있어 협상의 합의 도출자와 그 이행 실행자가 불일치할 개연성이 항상 열려 있다.

1994년 북-미 협상의 결과인 제네바합의가 무너지는 과정은 작은 거래조차 합의 이행의 시간 비용 문제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는 점을 잘 보여준다. 당시 빌 클린턴 민주당 행정부가 체결했던 제네바합의는 불과 한 달 후 치러진 중간선거에서 1952년 이후 42년 만에 미국 의회의 상하원을 공화당이 장악한 이른바 ‘깅그리치’ 혁명의 결과로 중유 공급과 경수로 건설 관련 예산 확보에 곤란을 겪어 이행에 차질이 생겼다. 정책 집행의 책임을 의회가 나눠 가지는 미국의 대통령이 중간선거에서 패배하자 합의 도출자와 이행 실행자의 불일치가 발생한 것이다. 8년 가까이 합의 이행이 지연되는 가운데 2002년 조지 W 부시 공화당 행정부는 제네바합의라는 ‘작은 거래’를 붕괴시킨다.

중요한 사실은 미 행정부를 장악한 정당이 바뀌면 합의 이행이 더 이상 지켜지지 않는 양상은 북-미 사이에서만 볼 수 있는 특이한 경우가 아니라는 점이다. 부시 공화당 행정부가 개시한 리비아에 대한 제재 해제와 관계 정상화 관련 합의 이행은 이후 버락 오바마 민주당 행정부가 ‘아랍의 봄’에서 비롯한 내전에 반란군을 지원하면서 깨진 바 있다. 오바마 민주당 행정부가 이란과 체결한 핵합의인 ‘포괄적 공동행동계획’ 역시 불과 2년 만에 트럼프 공화당 행정부가 제재유예 갱신을 거부해 사실상 붕괴했다. 전임 행정부가 체결한 합의를 당파적 색채가 다른 후임 행정부가 그 이행을 거부하는 일은 이제 미국 정치의 ‘뉴 노멀’에 가깝다.

미국이 국제협상의 합의를 장기간에 걸쳐 일관성 있게 이행하지 못하는 가장 큰 연유는 미국 정치에서 중도세력의 소멸과 관련이 깊다. 냉전 시기 행정부의 국제협상 결과를 대개 초당적으로 지지했던 미국 의회의 결정은 보수적 민주당 의원과 진보적 공화당 의원이 무시 못 할 규모로 존재했던 사실에서 그 원인을 찾을 수 있다. 정당정치의 양극화가 가져온 중대한 정책적 효과 중 하나는 행정부가 국제합의를 의회 상원 3분의 2의 동의를 요구하는 ‘조약’보다는 의회의 비준을 필요로 하지 않는 ‘협약’으로 체결하는 경향이 강해진 점이다. 초당적 지지를 획득한 국제합의를 뜻하는 조약의 형태로 그 이행을 실행한다는 것은, 행정부의 당파적 색채가 바뀌어도, 큰 거래가 높은 시간 비용을 견딜 수 있는 보호 장치를 마련했음을 함의한다. 반대로 협약의 형태로 그 이행을 실행한다는 것은, 행정부의 당파적 색채가 바뀔 경우 낮은 시간 비용을 요하는 작은 거래조차 붕괴의 위험에 노출됨을 뜻한다.

북-미 정상이 가까운 시일 안에 다시 만나 핵무장 해제와 관계 정상화를 주고받는 큰 거래를 도출할 가능성은 있다. 중요한 것은 합의의 규모가 아니라 이행의 속도다. 작은 거래의 이행조차 어렵게 만드는 미국 정치의 양극화 속에서 평양과 워싱턴이 어렵게 큰 거래에 합의한다고 해도 그 정치적 운명은 자명하다. 북-미 협상의 큰 거래는 미국 정치의 시간을 견뎌내지 못한다.

김정 북한대학원대 교수
#북미 협상#김정은#제네바합의#트럼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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